[사건] 1차 왕자의 난 ( 2 판 )
1. 소개
봉화백 정도전·의성군 남은과 부성군 심효생 등이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을 당하였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1398년) 8월 26일 기사 1번째 기사.
조선 초, 태종 이방원이 왕녀 시절에 일으킨 난. 무인년(戊寅年, 1398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하며, 이방원이 주도하여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음력 8월 26일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 정사란 사직을 안정시켰다는 뜻. 삼봉집에서는 '공소(恭昭)의 난'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이는 이 난으로 살해된 무안대군 이방번의 시호 공순(恭順)과 의안대군 이방석의 시호 소도(昭悼)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부른 표현이다.
신덕왕후 소생 방석을 세자로 삼고 사병혁파 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한 것에 대해 신의왕후 한씨 소생인 왕녀, 왕자들과 방계 종친들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쿠데타이다. 흔히 이방원의 난으로 알려져 있으나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방계 왕족들이 태조에게 반기를 든 왕실 내분이다. 이성계의 막내동생 이화, 이성계의 조카 이천우(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의 아들)와 조온(이성계 누이의 아들), 3남 이방의, 4남 이방간, 사위 이저(경신공주의 남편)와 그의 아버지 이거이 등이 자기 휘하의 사병들을 이끌고 적극 가담했고 장자 진안대군 이방우의 아들이자 장손인 이복근도 이방원을 지지했다. 주요 친인척들 중 참여기록이 없는 사람은 차남 이방과뿐 이다.
2. 발생 원인
2.1. 태조의 후계자는 누가 될것인가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태조는 50대 후반이라 후계자를 생각해야 할 나이였다.
왕후 | 아들/딸 | 생년 | 비고 |
신의왕후 한씨 | 진안군 이방우 | 1354 | 배제, 개국 공헌 |
영안군 이방과 | 1357 | 실질적 장남, 개국 공헌 | |
익안군 이방의 | 1360 | 개국 공헌 | |
회안군 이방간 | 1364 | 개국 공헌 | |
정안군 이방원 | 1367 | 개국 공헌 | |
문안군 이방연 | 1370? | 사망 | |
신덕왕후 강씨 | 무안군 이방번 | 1381 | - |
의안군 이방석 | 1382 | - |
당시 태조의 아들들과 딸을 살펴보면 장남 이방우, 차남으로 훗날 정종이 된 이방과, 셋째 이방의, 넷째 이방간, 다섯째로 훗날의 태종인 이방원, 여섯째로 이미 요절한 이방연, 일곱째 이방번, 여덟째 의안대군 이방석이 있다. 방연까지가 개국 이전에 사망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아들이고, 방번과 방석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아들이다. 세자 책봉 당시 이방번은 12세, 이방석은 11세로, 당시 이방과가 36세, 이방원이 26세였으며 여섯째 이방연이 살아있었다면 20살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므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과 나이 차이가 심했다. 이미 장성해 있던 신의왕후 소생 왕녀와 왕자들은 요절한 방연을 제외하면 크건 작건 다들 개국과정에 참여해서 일정한 공을 세웠다.
일반적인 적장자 계승 원칙을 따른다면 이방우가 세자가 돼야 했겠지만, 그는 조선 건국에 반대한 이색의 사위였고, 조선 역사관에선 신돈의 손자였던 창왕의 즉위에 공헌한 바 있엇기에 공양왕 즉위 이후 정계에서 사라진다. (이방우 문서 참조.) 게다가 폭음으로 조선 개국 직후인 1393년에 사망해 버린다. 방우가 생전에 가졌던 '적장자'로서의 위상은 방우의 아들 이복근 대신 차남 이방과에게 내려가 방우의 후손들은 정치실권에서 완전히 배제된다. 방우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 되었지만 여전히 걸리는 게 있었다.
태조는 고려로 귀순해 중앙정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정계 실력자들을 필두로 한 고려 지배층과 적극적으로 혼인관계를 맺었다. 맏이 방우는 지윤의 딸과 결혼했고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였다. 이색은 고려말 정계와 학계의 구심점으로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에 맞섰던 인물이다. 게다가 방우는 이색과 함께 (조선시대 역사관에선 신돈의 손자인) 창왕 옹립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방과는 증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혼인했고 지윤의 두 딸을 첩으로 들였다.(숙의 지씨, 성빈 지씨) 방의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혼인했는데 최인두는 동주최씨로 바로 그 최영과 인척관계에 있다. 방간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과 혼인했고, 이방원은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과 혼인했는데 민선과 민제는 모두 황려민씨(여흥민씨)로 재상지종으로 불린 유력 권문세가다. 신덕왕후 강씨의 딸인 경순공주는 그 이인임의 조카인 이제와 혼인했고 방번에 이르면 공양왕의 조카사위(…)다. 즉, 신의왕후 한씨 소생 왕녀와 넷 아들과 방번은 모두 고려 구세력(심하면 왕족)과 혼맥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러한 혼맥은 변방무장 출신 태조가 중앙정계에 순조롭게 연착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 이후엔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 막내 아들 방석만이 고려 구세력과의 접점이 없었다.
다만 이 구세력과의 결별설은 어디까지나 추측임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래에서도 다시 검토하겠지만 신의왕후 소생들이 권문세가에게 장가를 들었다면 이방석은 아예 권문세가의 외손이라 딱히 명분 면에서 우월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요인은 방석이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현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라는 점이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1년 전에 사망했고, 건국 후 절비(節妃)란 시호를 내려 어느정도 예우를 갖추긴 하였으나 죽은 신의왕후의 권위가 현 국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현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고 집안 면에서도 안변 향처와 개경 경처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태조 대에는 그녀에게 왕후의 시호를 내리지도 않았으며 태조 2년 한씨의 3년 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의 예우는 끝났다. 반면 개국 직후 공신들이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 때 동시에 공신부인들이 강씨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 강씨의 권세는 공인되어 있었다.
실제로 실록을 보면 먼저 태조가 신덕왕후의 첫 아들인 이방번의 세자 책봉을 밀고, 정도전을 포함한 신료들이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배극렴이 총대메고 나서서 이방번 대신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해 일이 마무리된다. 구세력과의 결별이라는 목표가 그렇게 중요했다면 하필 권문세가 외가+고려왕실 처가라는 크리티컬 크로스(...)의 이방번을 세자로 미는 것은 자가당착이라 할 수 있다. 결국 태조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사랑하는 신덕왕후의 소생을 세자로 올리는 것이었으며, 고려왕실과의 연계성이라는 이방번의 치명적인 문제점은 그 다음 단계에 가서야 고려대상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2.1.1. 말자상속?
일각에는 막내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말자상속 풍습이 있는 유목 민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일단 이안사 이래 쌍성 전주이씨 가문은 이자흥 이전까지 계속해서 장자가 아닌 아들이 쌍성의 천호직을 이어온 바가 있으니 일견 그럴듯한 주장이다. 하지만 세부적으로 따져보면 가능성은 매우 낮다. 핵심은 과연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 유목민의 말자상속 원리에 부합하는가? 하는 점이다.
말자상속의 핵심은 장자부터 재산을 분배받아 먼 땅을 개척하고, 말자에게는 마지막으로 남은 본가를 물려준다는 데 있다. 이것도 정말 문자 그대로 무조건 애송이 막내한테 지위를 때려박아주는 게 아니라 가장이 죽은 시점에서 집에 남아있는 아들들 사이에서 경쟁하는 쪽에 가까웠다. 이 원리에 따르면 오히려 말자가 물려받은 본가는 쭉정이만 남은 상태에다가 더 이상 확장할 곳도 없으니 오히려 독립해나간 형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 그 본가가 한 국가의 왕실이 된다면? 무슨 밑천을 떼어주든 본가를 물려받는 게 장땡이다. 이때문에 몽골제국도 초창기에는 아들들을 이리저리 외지로 보내 정복왕조를 세우도록 해줬지만 그게 한계에 다다른 이후에는 장자부터 말자까지 동등하게 제위에 도전하는 쪽으로 갔다. 처음부터 반농반목 체제였던 여진족의 금나라는 화북왕조화 된 이후 하도 황위계승이 개판 오분전이라 그렇지 대체로 장자상속을 따랐다. 만주족의 청나라는 정복왕조들 중에서도 유독 어린애한테 황위를 잘 물려준 케이스인데, 이쪽은 주로 택현(澤賢)의 논리로 후계자를 지명했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당시 갓 10대에 접어든 이방석을 지명하는 것은 유목민의 상속제도에 비춰봐도 크게 무리수였다. 성리학을 근본이념으로 삼는 중앙집권국가 조선에서, 그것도 왕실에서 큰아들에게 무슨 밑천을 마련해줘서 독립시키겠는가? 혹은 이방석이 무슨 근거로 택현을 내세우겠는가? 이성계 이전의 사정을 보면 이행리의 경우 형들이 이미 원 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을 했고, 이춘은 동복형 이송이 고려 숭록대부였던 것을 봐서 쌍성을 떠나 고려에 출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원계 또한 이자춘의 귀부 이전에 이미 고려에서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과거에 연이어 급제하는 등 일찌감치 쌍성을 떠나 있었다. 즉 큰아들은 중앙에서 벼슬살이를 시키고 집안에 남은 아들들 중에서 서열이 높은 쪽에게 쌍성 천호직을 물려주는 것이 이성계 집안의 말자상속방식이었는데, 사실 이성계가 고려 귀부 이후 동북면, 즉 옛 쌍성 전역을 개인 영지 수준으로 다스리게 되어서 그렇지 과연 쌍성 총관도 아니고 천호직이 원이나 고려 중앙조정의 벼슬보다 값나가는 자리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정적으로 유목민족도 장남에게 떼어줄 거 없으면 집안을 줬다.
애초에 전주이씨 가문 자체가 쌍성 시절 내내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여진이나 몽골족에게 동화되지 않았다. 익조 이행리는 아예 고려계라는 이유로 여진족 천호들에게 다굴당해 쫓겨났을 정도고, 이후로도 고려에게 귀부하는 그 순간까지 전주이씨 가문의 기반은 고려계 주민집단이었으며, 줄기차게 고려계 집안끼리 통혼해왔다. 큰아들을 출사시킬 수 있을 때는 어떻게든 벼슬살이를 시키려 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오히려 이자춘의 형 이자흥처럼 원 조정으로부터 직접 적장자 인증을 받아 집안을 이었으며 이자흥 사후 이자춘이 어린 조카 이천계를 제치고 천호 벼슬을 꿀꺽(...)하자 이자춘 사후 이천계가 적장자임을 이유로 이성계를 죽이고 가주 지위를 돌려받으려 하기도 했다.이재현? 이성계는 아버지와 함께 공민왕에게 귀부할 때부터 고려인을 자부했고 고려인 대우를 받기 원했으며, 여진족 티를 내지 않고 철저히 개경의 중앙귀족으로 정착하려 하였기 때문에 유목민 풍습은 설령 있다 해도 척결 1순위였다. 이성계가 개경으로 나온 이후에는 고려귀족으로서 형제간의 서열과 가문의 후계구도가 확실하게 정착되어서 장남 방우가 개경의 대귀족인 전주이씨 가문의 차기 당주로서의 특권으로 음서로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고, 차남 방과 또한 이미 동북면 영지와 가별초를 물려받을 군사방면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에게 군인 수업을 받고 있었다. 더구나 조선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사대부 중에서도 공민왕 이래의 급진 반몽주의자들이었던 것만 봐도 몽골유목민의 말자상속제를 여염집도 아니고 무려 세자 책봉에 적용한다는 것은 재고할 가치가 없다.
그보다는 이성계 집안의 내력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이행리는 두만강변 여진족 천호들에게 밀려난 뒤 안변의 최씨집안에게 후원을 받아 천호 자리를 되찾고 최씨 여식을 계실로 들여 정실의 자식들을 제치고 최씨의 아들인 이춘을 후계자로 삼았다. 또 본인부터가 출중한 능력을 기반으로 먼저 고려에서 벼슬살이하던 이복형 이원계를 제치고 사실상 전주이씨 가문의 당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 큰아버지 이자흥이 계모와 싸워가며 천호 자리를 물려받은 사례가 있긴 하지만 이것도 이자흥 사후 자기 아버지가 자기 사촌형을 제끼고 자리를 물려받았다.(...) 즉 적장자 계승이 원칙적으로는 맞기야 하지만 확실한 뒷배가 그 원칙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며, 특히나 이행리가 최씨에게 그랬듯이 자신의 개경 정착과 성공에 강력한 힘을 보태준 현 중전 강씨의 요구는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기에 대신들이 단순히 적장자 원칙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공이 있는 왕자까지도 후보로 언급하고 있으니 더더욱 굳이 장자는 아니어도 된다 이거지?라는 행복회로 발상까지 더해졌을 것이다.
어쨌든 문제는 조선이 유목제국이나 봉건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토사구팽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많았다. 왕자들과 고려 구 세력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한양 천도 직후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배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살아있는 현 왕비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어머니 신덕왕후의 사망으로 사라지면서 이복형들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태조는 일부러 그녀의 능 정릉(貞陵)을 도성 내, 그것도 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또한 세자빈 심씨를 현비로 책봉하고 방석과 현비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왕손의 개복신 초례(開福神 醮禮)를 세자전 남문에서 거행해 태조 - 세자 - 왕손의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왕손이나 세자나 아직 어렸고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의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2.2. 간과한 것
태조나 공신들이 막내를 세자로 만들었을 때는 나름대로 명분(현존 왕후의 자식)은 있고 재상 중심 정치를 만들기 위한 정도전의 구상 때문에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나중에 큰 혼란을 만들어낸다.
공신 측에선 '지금 왕후가 누구신데 당연히 왕후의 자식께서 세자가 되셔야지!', '무엇보다 왕이 결정하신 거다!'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고, 마찬가지 방과, 방원 등도 불평하거나 반발하는 순간 불충으로 찍힐 수 있어서 일단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안의 분노와 실망은 절대로 지울 수 없었다.
아무리 태조에게 자신만의 명분이 있다 해도, 조선이 건국되고 제왕학이나 역사를 배웠다면 막내에게 물려주다가 멸문당한 문벌군웅, 동생이 태자 책봉 직전까지 가서 친족을 약화시킨 황제 등 장자상속을 지키지 않아 혼란의 시대가 온 사례가 수도 없이 많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미 한국사에서 이성계와 똑같이 자수성가하여 무력에 기반해서 나라를 세우고 장자를 무시하고 후처 소생의 막내를 후계자로 세우다가 쿠데타로 모든 것을 잃은 견훤이라는 반면교사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막내를 책봉한 건 엄청난 리스크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 ① 모든 권위의 시작과 끝 - 신덕왕후
- 의 조카사위)가 있었기 때문. 문제는 신덕왕후가 한양 천도 이후 사망해 버린 것. 다른 그 어떤 이유보다
신덕왕후의 죽음이 무인정사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 동복형이 몇 명 있던 종법상 왕자들의 어미인 신덕왕후가 멀쩡했으면 서자 운운하는 말이 나올 수 없었고 쿠데타 자체가 발생할 수 없었다. 신덕왕후가 사라지고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태조의 노력도 한계가 자명했기에 방석의 입지는 급격하게 위태해졌다. 이건 방석의 불행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데 신덕왕후는 사망 당시 고작 40세였다.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우보다 어리고 이방과보다 겨우 1살 많던 그녀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날 줄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 하지만 한걸음 더 들어가자면 이것도 그렇게 완벽한 장치만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큰아버지 이자흥과 아버지 이자춘은 모두
적장자임을 내세워
- 계모의 집안인 한양조씨를 이겨먹은 바가 있었다. 그때도 이춘의 계실 한양조씨는 첩 따위가 아니라 당당한 후처였고, 한양조씨 집안은 무려
쌍성총관
- 을 지내는 집안인지라 상대적인 파워 면에서는 오히려 조선이라는 한 국가 내에서의 곡산강씨 집안보다 강력하면 강력했지 부족하진 않았다. 하물며 신덕왕후는 차남(사실상 장남) 방과와는 1살 차이밖에 나지 않으며 야심만만한 방원과도 9살 차이에 불과하니
웃어른으로서의 권위
- 도 작정하고 뭉개려면 얼마든지 뭉갤 수 있었다. 또한 정실 왕비/대비는 단순히 존재만 한다고 권위가 생기는 것이 아니며 왕비/대비를 구심점으로 외가가 후계자를 단단히 받쳐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권위를 발하는 것인데,
- 분명 신덕왕후는 곡산강씨-진주강씨라는 명문가 출신이었고 실제로 이성계의 성공에도 막대한 힘을 보태주었지만 정작 그녀의 친인척들은 아래에서도 살펴보듯이
신덕왕후 생전에도
- 신극례 남매처럼 방석의 후계에 전혀 호의적이지 않았다.
- ② 형들이 많은데 막내가 되었다.
- 게다가 건국 초기인 만큼 왕조의 정통성 확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장자도 아니고 건국공신도 아닌 방석은 신덕왕후의 아들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정통성이 한참 부족했다. 능력이라도 가장 출중했다면 모르겠으나, 능력 면에서는 아버지 이성계를 뛰어넘은 먼치킨인 이방원이라는 형이 있었다. 신덕왕후가 살아있었을 때는 살아있는 정비의 아들이라는 명분에다가 생모인 신덕왕후가 직접 보호해줄 수 있었지만 신덕왕후가 죽자마자 이 보호막이 사라져버린 것.
- 다만 첫 번째 리스크와는 달리 세자를 폐위시키려면 명분이 있어야 했는데, 바로
적장자를 놔두고 서자가 웬 말이냐!
- 였다. 즉 '건국에 나름 공헌을 하고 장자 역할을 충실히 하는 방과를 놔두고 방석을 세우는 건 잘못된 도리다'라는 논리였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방원 측은 이성계 사후에 신덕왕후에 대한 예우를 아예 후궁격으로 격하시켜버린다. 그리고 이 역시 명분이 있었던 것이,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를 서장자로 만들기 위해 그 모친이며
이자춘의 정실이었던 한산 이씨를 첩으로 격하시켜버렸던 것이다
- .
아버지도 했으니 저도 합니다
- 게다가 4형제의 어머니인 안변 한씨 역시 정식 왕후로서의 대우를 못 받고 그저 절비의 시호로 때워버렸으니 정종이나 태종으로서는 아버지 생전에 신덕왕후를 강등시키지 않은것만으로도 할 도리는 다 했다고 강변해도 이상하진 않은 일이었다. 사실 이성계 생전에도 이방원은 죽은 신덕왕후를 제대로 예우하지 않았지만 될 수 있으면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완전히 격하시키진 않았다.
- 그 결과 태조 사후 편찬된 태조실록에서는 일관되게 이방석을 '서자'라고 칭했지만, 그 실록조차도 모든 사실을 완전히 갈아엎는 것은 불가능했는지 이방석 책봉 당시 태조가 행사한 영향력은 가감없이 적어놓았다.
그러고서 무인정사 파트에서는 갑자기 정도전 욕한다
- ③ 납득할만한 책봉의 근거가 없다.
무서운
- 형들이었다. 특히 업적을 생각한다면 방원을 세자로 안 세우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태조는 이를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삼은 데다가 그 명분을 제공하지도 못했다. 방석이 형들 다 제치고 황제가 된
- 처럼
5살때부터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고 어쩌고 하는 무서운 재질
- 을 보여주기라도 했으면 모를까 딱히 그런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조차도 사학에도 안 가고 개인과외만 받아서 과거급제한 먼치킨 형이 있다
- 이는 고생한 자식들을 홀대하고 새엄마의 자식만 편애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아무리 태조가 무섭더라도, 섭섭함과 실망감은 감추기 어려웠다.
- 사실 방석의 어린 나이가 그나마 강점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라면 그나마
어린 나이부터 유교적 제왕학을 학습시킬 수 있다
- 는 것이다. 태조는 본인이 무장 출신이라 제대로 된 제왕학 교육을 받지 못했고, 안그래도 신왕조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후계자는 보다 체계적인 준비를 거쳐 즉위하기를 바랬을테니 어린 방석에게 여기에 대해 나름대로 기대가 컸을 것이다.
- 더하여
- 도 있으니 조금씩 정치적 경력을 쌓아주면 되리라고 생각했겠지만 일단 태조 본인이 세자책봉 당시 이미 환갑으로 인생의 말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
- 게다가 태조실록이 아무리 태종 시대에 간행됐다는 점을 고려해도 이방석은 세자로서 딱히 정무 경험을 착착 쌓아올린 흔적도 보이지 않고,
- 오히려
- ,
- ,
- 놀아제끼려 해서 태조가 친히
- 라고 이르는 등 여러모로 말썽을 일으켰다.
분명히 이방번은 망나니라 사리분별이 되는 이방석을 골랐다고 했는데?
- 이방석이 죽을 때는 만 16세로 오늘날에 대면 고1 정도의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당대 사회 수준을 생각하면 태조와 정도전 일파가 집중관리해준 세자로서는 여러모로 부족해보인다.
- 그게 아니라면 세종조에 했던 것처럼 세자와 대군들 사이의 예법을 확실하게 정한다거나 하는 사전작업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이조차도 없었다.
- ④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신덕왕후야말로 전통의 명문가인 진주 강씨 집안이며 그 인맥으로 이성계를 고려 중앙귀족 사회에 안착시켜준 것이 아니던가
- ? 결국 향처의 아들로 권문세족과 혼인한 큰아들들 vs 권문세족 외가를 두고 신진사대부와 혼인한 막내아들
그리고 권문세족 외가+고려왕실이 처가인 7째는 웁니다
- 의 구도에서, 후자가 딱히 전자에 비해 전왕조 시대의 유산에서 자유롭다는 근거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가 없는 노릇이다.
- 사실 성리학을 전면에 내세운 신진사대부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왕이 설령 구체제와의 결별이라는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했다 해도 적장자상속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종법을 깡그리 무시하는 - 그것도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할 왕실이! - 이런 후계지명을 마냥 지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기에 조강지처인 절비 한씨에 대한 예우 문제나 세자의 외가 문제까지 겹치니 결과적으로 당대의 그 어느 누가 보든간에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그저 젊은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 일당의 야합이며 이성계의 오판으로 해석할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방석의 책봉이 구체제와의 결별이라는 목적에 부합하기라도 했으면 무인정사에 대한 신진사대부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방석 친위세력의 핵심이었던
- 의 준복권
- 역시 먼 훗날에야 실현되었을 것이며, 새로 집권한 이방원은 인재풀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 것 이외에 딱히 이방석의 살해에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이방원은 동생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제낀 패륜을 저지른 것 치고는 너무나 수월하게 정권을 장악했을뿐만 아니라 무인정사 당시 이래저래 반대파로 엮여서 하옥되거나 처벌된 이들도 나중에 은근슬쩍 중앙에 복귀해 벼슬살이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심지어 이방원은 수많은 공신들을 이래저래 숙청하면서도 능수능란하게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이후 세종 시기 관학파의 전성시대에 토대를 닦아주었다.
- ⑤ 적이 너무 많다.
- 동시에 적으로 돌리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태조와 신덕왕후 일가+정도전 일파를 제외한 조선 중앙기득권층 전부
- 를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다. 조선 건국의 주역이 신진사대부라지만 정도전처럼 정말 지방에서 올라와 어렵게 공부해서 사대부의 반열에 합류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오히려 조준, 권근, 민제, 김사형 등등 한가닥하는 집안 출신 사대부들이 수두룩했으니 이게 얼마나 거대하고 무모한 시도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위에서 구세력과의 결별이라는 목표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방석을 후계자로 옹립하기로 결정한 직후 이들의 행보는 분명히 큰왕자들에 대한 토사구팽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결국 태조나 정도전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큰왕자들과 혼맥으로 얽힌 권문세족 출신들에게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읽힐 수밖에 없었다.
- 여기에 진성신진사대부
딱히 쓸만한 용어가 없다
- 정도전 일당이 정국을 주도하고 각종 강경책이 봇물을 이루면서 결국 주류를 차지하는 권문세족 출신들은 이방석 즉위 이후의 상황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 이처럼 적이 많을 때의 기본 전략은 모름지기
적의 적은 나의 편
- 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례로 막내가 즉위한
- 사례를 보면, 왕위 계승의 경쟁자들이 서로 극한 대립으로 치닫다가 결국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가장 만만한 막내를 후계자로 세우고 권력을 적당히 갈라먹은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순치제 모델이 홍타이지의 급서라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성립된 것이긴 하지만, 보다 핵심적인 요소는
상호 견제의 결과 권력의 분점에 대한 합의
- 에 있다. 즉 방석의 친위세력은 납득하기 어려운 세자책봉에 대하여 어떻게든 반대급부를 제공함으로서 불만을 누그러뜨리거나, 반대세력의 두 축인 큰왕자들과 권문세족 출신 공신들을 분열시키든가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권력의 분점은 고사하고 반대세력 탄압에 열을 올리며 어그로만 만땅을 끌면서 큰왕자들과 공신들의 일대 야합을 오히려 촉진시켜버렸다. 특히 조준, 김사형 같은 대신들은 반정 당시까지만 해도 과연 붙어줄지 말지 미지수 그 자체였지만 정작 일이 터지자 별 다른 밀당조차 없이 너무나 수월하게 반정진영에 합류해버렸다.
- 명분은 없고 적은 많으니 방석의 친위세력은 무리수를 남발했다. 초장부터 명확한 설명도 없이 세자빈 유씨를 폐출시켜버리더니
- 제후국 주제에 왕자들의 분봉이라는 신박한 삽질을 시도하는가 하면, 급기야 세자의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어야 할 신덕왕후가 급사하자 도성 내, 그것도
왕궁 코앞에 묘를 쓰는
- 초유의 편법이 터졌다.
- 이어 이미 자신들이 반대를 넘어 아예 항명에 이은 정변까지 일으켜버린 바 있는
요동 정벌
- 을 재추진하고 이를 빌미로 사병혁파를 강압적으로 실행에 옮겼지만, 정작 인력풀의 부족으로 가장 경계해야 할 종친들을 대거 진도(진법)훈련에 동원하면서 오히려 거병의 기회를 조성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무리수는 결국 신덕왕후의 조카인 상장군 신극례마저
이숙번과 그의 수하들을 유숙시켜줘가며
- 무인정사에 참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오죽하면 신극례의 여동생이 대놓고 이모인 신덕왕후에게
- 라고 일갈할 지경이었다. 즉 방석을 가장 지지해줘야 할 그의 외가 쪽 친척들마저 등을 돌릴 정도였으니 얼마나 민심이 돌아섰는지 알만한 일이다.
- 이렇게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우군을 만들어주려다보니 자연스럽게 동복형인
- 에게 차츰 권한이 몰리게 되었다. 아래에서 보듯 좌군절제사가 되어 매형 이제와 함께 삼군부를 맡는가 하면 사병혁파 때에도 이방번만은 사병의 유지를 허락받았다. 문제는
이방번에게 힘을 실어주면 해결되는가?
- +
이방번은 확실히 방석의 편인가?
- 하는 것이다. 우선 이방번이 방석보다 형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1살 많을 뿐이다. 즉 삼군부 좌군절제사가 된 태조2년에 그는 고작
13살
- (...) 매형 이제가 정몽주 암살모의에 참여했을 정도로 나이가 좀 있긴 했지만
- 이래가지고서야 권위고 뭐고 이방원을 위시한 신의왕후 소생들, 종친들 입장에서는
쇼한다
- 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동복과 이복을 떠나서
동생에게 지위를 뺏긴 형
- 이라는 입장은 이방번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아닌 게 아니라
- 역시 이복동생들 다 죽여놓고 났더니 다시
- 과 칼을 맞대지 않았는가? 다시 언급하겠지만 실록에 따르면 이방번은 나름 세자위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이방원이 난을 일으킨것을 알고도 딱히 세자 편을 들지도 않고 그냥 관망만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어차피 태종 정권의 입장에서 자기들이 방석과 도매금으로 살해한 방번을 굳이 억울한 방관자로 만들어 줄 이유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록의 신빙성은 절대 낮지 않다. 어쩌면 태조가 기껏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을 이러저리 쳐내가며 방석의 승계를 준비해놨더니 막판에 가서
이방번의 난
- 이라는 초대형 통수를 맞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네가 방석이와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2.3. 예방책?
태조도 이에 대한 걱정을 안 한게 아니라서 나름대로는 예방 조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초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군사력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이방과와 이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이제야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도 아예 모른 척 할 순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성계에게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동북면의 가별초 지휘권은 이방원에게 잠시 주어졌다.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 방번이 넘겨받는다.(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였다.
더불어 왕자들을 지방 절제사로 전임시키면서 아예 지방으로 내보내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 일당은 환관 김사행을 사주하여 왕자들을 아예 제후처럼 분봉시키는 방안을 밀어붙이려 했으나 태조가 답을 안해주고 오히려 정안군에게 하도 말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고 한다. 사실 고려식 외왕내제도 아니고 대명 사대를 국가전략으로 채택한 주제에, 또 성리학적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한 주제에 왕자들의 분봉책을 시도한 것은 무리수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아예 중앙에서 벗어난 왕자들이 지방군을 이끌고 도성을 공격한다면 이 또한 죽쒀서 개주는 꼴이다. 왕자들의 지방행이 좌절된 정도전은 이후 요동정벌과 이를 구실로 한 사병혁파 정책을 추진한다.
그러나 정도전 일파에 대한 불만, 사병혁파와 요동정벌 등 급진정책에 대한 반발은 태조의 예상 이상으로 거세었다. 사병혁파와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 징집은 반대파로서는 자신들의 수족을 자르려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실제로 이방원의 경우 신덕왕후에 대한 경계심까지 합쳐져 사병혁파를 계기로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정도전은 분명 출중한 인물이지만 정치적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럴수밖에 없는게 정몽주나 하륜이 중앙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며 정치가 뭔지 몸으로 체득할때 정도전은 지방에 유배되어 그런 경험을 전혀 쌓지 못했다. 힘을 가진 1인자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주는 것과 직접 똥물에 몸담그는건 전혀 다른 문제인데 이 부분에서 사형 정몽주나 경쟁자 조준, 하륜보다 서툴렀다. 그래서 건국 이전에는 2인자 자리를 홀로 차지하지 못하고 조준과 나눠야 했고, 조준의 전제개혁때 전혀 끼어들지 못해 존재감이 낮아졌다 교우관계(이숭인, 권근)를 단절하며 척불정책을 강행해야 했다. 그의 정책들은 건국 초기 필요한 것이었지만 너무 급진적으로 전개한데다, 반대파의 반발을 너무 강경하게만 대처했기에 그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2.4. 정도전의 대명강경책과 군제개혁
이렇게 세자 문제로 혼돈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발표한다. 당시 조선과 명은 표전문 사건 등 외교문제로 인한 사신 억류 등의 문제가 터지면서 골이 깊어지고 있었는데 이 때 표전문을 짓는데 참여했던 권근은 태조가 따로 부르지도 않았어도 스스로 찾아가서 '저도 표전문 사건에 관련되어 있으니 제가 가서 직접 해결하게 오겠습니다.'라고 하며 자원해서 명에 갔다왔다. 권근의 노고로 일은 잘 처리되었고 권근도 황제(주원장)에게 대접까지 융숭하게 받으며 성공적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정도전과 그 파벌은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온 권근을 사헌부를 통해 탄핵해버렸다. 이유는 정총 등 표전문 관련으로 억류된 이들 가운데에 홀로 살아 돌아왔다는 것. 물론 태조는 '만리 길 마다 않고 자원해서 일 처리하고 온 권근에게 상은커녕 무슨 탄핵이냐?' 라며 씹어버렸다. 결국 정도전은 이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민심과 사대부의 지지만 잃어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태조가 그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표전문 사건이 마무리된 후 정도전은 이참에 아예 요동을 공격하여 명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과격한 모습을 보였고 그를 위한 군사 개편까지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발로 공신과 종친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들을 회수하여 조선의 중앙군을 강화하는 '사병 혁파'를 추진한다.
하지만 그의 사병 혁파 시도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애초에 이성계 본인이 사병을 가지고 왕이 된 만큼 이를 모두 혁파하려면 사병의 준동을 진압할 수 있는 훌륭한 관군이 확보되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중앙군이라곤 본래 함흥의 이성계 일가에게 충성하던 직속 가별초들이었다. 이들이 함흥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정도전이나 이방번에게 복종하여 다른 전주 이씨 문중 인사들을 가차없이 적대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또한 함흥 출신 왕자들과 문중의 종친이 보유하는 사병들 또한 본래 가별초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지휘 아래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수많은 주변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역전의 용사들이다. 이들은 일반 사병보다도 더 특정 가문에 대한 사병화의 정도가 심각했기 때문에 모시는 주군들이 극구 반대하는 관군으로의 강제편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장 사병 몰수 대상 리스트에 있는 이지란이 가별초의 실질적 2인자, 이방과가 가별초의 차기 수장이었는데 아무리 1인자의 위세를 빌린다 한들 낙하산 문신 정도전과 큰마님을 밀어낸 후실의 막내아들이 가별초에 발휘할 수있는 영향력은 한계가 명백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사병혁파는 필요한 정책이었지만 당시 실행자가 당시 신권정치 실현을 빌미로 정계의 온갖 어그로란 어그로는 다 끌고다니던 정도전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정도전은 이러한 사병혁파를 추진하면서 당연하게도 공신은 물론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왕실 종친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안그래도 세자 책봉 문제로 골이 깊은 상황에서 이러한 발표가 나오니 자신들의 수족이 잘린다는 생각을 넘어서 정도전 이놈이 기어이 아버님으로부터 나라를 뺏기 위해 우리를 모조리 죽여버리려고 수작을 부리는구나!라며 이를 박박 갈았다.
게다가 사병혁파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요동 정벌도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조선 건국세력이 본격적으로 고려를 뒤엎은 시발점이 다름아닌 위화도 회군이었기 때문. 이미 두 번의 요동 정벌이 모두 별 소득 없이 끝난 마당에, 조건은 오히려 더욱 불리해진 상황에서 추진되는 요동 정벌은 그다지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요동 정벌에 명분이 없으니 이를 명분삼아 추진되는 사병혁파도 자연히 명분을 잃었다. 특히 태조 조차도 요동 정벌을 크게 지지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도전만이 이리저리 날뛴다는 것이 어떤 그림으로 보여졌을지는 누구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여기에 형평성이나 제대로 맞췄으면 모를까, 방석의 동복형 방번에게는 상당한 규모의 사병을 유지하도록 해주면서 대놓고 사병혁파의 목적이 방석 반대파에 대한 견제에 있음을 인증해버렸으며 자연히 요동 정벌의 진짜 목적에도 의심을 가질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이런 배경을 생각해보면 종친모해죄라는 발상이 거저 나온 것은 아니며, 의외로 당대 사람들에게도 그럭저럭 말이 되는 논리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3. 쿠데타의 전개와 결과
기본적으로 실록의 내용 자체와 당대 문집과 증언들이 하나로 일관되지 못하고 전부 제각각이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기 어렵다. 반군의 병력이 많았다고 하기도 하고 적었다고 말하기도 하며, 전투가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없었다고 하기도 한다. 박위가 이방원의 군세를 살피러 갔다가 잡혀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난전 중에 전사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김사형과 이무 등은 미리 포섭된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투항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일단 거사 당시부터 이방원에게 합류한 지휘관급 인원은 지안산군사 이숙번, 전 평안도 병마도절제사 이거이, 전 충청도 도절제사 조영무, 상장군 신극례 등이었다. 지안산군사 이숙번은 안산군 병력을 동원했을 것이며, 왕자들을 진법 훈련에 투입해가며 열을 올리던 시기인지라 상장군 신극례나 각 왕자 및 종친들이 훈련시키던 각 진의 병력만 족히 네자릿수는 동원이 가능했을 것이다.머릿수빨 특히 실록의 표현을 따르자면 시위패를 폐한지 10여일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중앙군으로 편입된 각 집안의 가병들이 옛 주인들에게 달려와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객관적 기록으로 보자면, 이숙번, 하륜 등은 확실히 반군 편에 서서 군대를 지원했고 이화, 이천우 등 많은 종친들이 참여했다. 이천우는 특히 정도전이 살해된 이후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입궁하려다가 정안군 측에서 일을 벌인 것을 알고 바로 합류해 "왜 나한테는 미리 말 안해줬냐"며 징징(...)대기도 했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장지화, 이제, 유만수, 변중량 등이 살해되었으며 왕씨 학살에서 겨우 빗겨났던 개성 왕씨들도 다수가 죽임을 당했다. 다만 하륜은 기록을 보면 8월 초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내려가 있다가 거사를 전후하여 단기로 서울에 올라와 이방원 지지선언을 하고 후속 병력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 정도전에 이은 신권 2인자 조준은 점쟁이를 불러 누가 이길지 점을 쳐보고 반란군이 이긴단 점괘가 나오자 왕도 세자도 아닌 정안군 이방원에게 끓어 엎드렸다.
신덕왕후 소생의 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또한 살해되었다. 특히 이방번은 당시 유일하게 사병 보유가 허가되어 이방원이 거병 초반에 찾아가 합류할지를 물었는데, 이방석이 제거되면 자신에게 세자 자리가 오지 않을까 하는 계산으로 대답 없이 그냥 집안에 들어가 드러누웠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아이러니한 것이 이방원은 태조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켰을 때 신덕왕후와 두 이복동생이 고려 조정에 의해 인질이 되거나 보복 살해를 당하지 못하게 구해줬는데, 신덕왕후와는 척을 지고, 두 이복동생은 자기가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실 정몽주를 죽인 직후에도 이방원이 신덕왕후에게 "엄마는 왜 내 편 안 들어줘요?"라며 하소연할 정도로 서로 믿고 의지했다는 것을 보면 참 씁쓸한 일이다.
이직은 원래 제거 대상에 있었으나 종으로 위장하여 목숨을 건졌다. 영안군 방과는 아버지의 쾌유를 위한 제사를 준비하다 반란 소식을 듣자마자 달아나 숨었고, 익안군 방의와 회안군 방간은 실록 묘사를 빌리면 말도 없이 뛰다가 자빠지기까지 하면서 열렬히 반란에 호응했다. 이방우의 장남이자 이성계의 적장손인 봉녕군 이복근은 이방원 편에 붙어서 공을 세우고 봉녕부원군의 작위를 얻었다.
궁궐수비대 총지휘관 박위 또한 살해당하고 공동으로 지휘를 맡았던 조온은 반군에 합류했다. 궁궐 내 다른 곳의 수비를 맡았던 이무도 조온이 투항하고 박위가 죽었단 소식을 듣자마자 투항했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궁궐 오위군 중 하나인 호분위의 군사 전원이 이성계 가문 가별초(사병)들이었다는 것. 이들은 이성계의 지휘 아래 황산 대첩, 개경 탈환 작전, 나하추 전투, 이오르 티무르 전투 등에서 승리한 당시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오랜 세월 동북면에서 이성계 일가에 충성을 바쳤던 가별초들이라면 태조가 직접 내린 공격명령이나 태조가 시해될 정황이 없는데 자기들이 도련님으로 모셨던 동북면 출신 왕자들에게 칼을 빼들고 대항할 의지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동북면 출신 왕자들이 주축인 반군도 전심전력으로 자기 가문의 정예 사병들과 적대할 계획은 없었을 것이다. 가별초를 포함한 수비대 전원을 전멸시킨다면 피해가 심할 것은 자명했기에 미리 지휘관들을 포섭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오히려 가별초들은 동북면 도련님 들이 내세우는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냐, 정씨의 나라냐?"라는 구호에 누구보다도 쉽게 동조가 가능할 세력이었다. 실제로 이방원은 즉위한 후 이 때의 일을 가리켜 "무인년에 입직하는 갑사가 갑옷을 버리고 달아났으니, 이것이 서얼을 도울 것이 아님을 안 것이다."라고 하여 당시 궁궐수비군의 투항으로 일이 쉬웠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반군이 공성전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궁궐에 입성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일 현장을 지휘하던 박위는 이미 궁궐 내의 다수가 사전모략을 했거나 포섭됐다는 것을 파악하고 전투의지를 상실해 투항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아예 조온, 이무 등에게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도 있다. 박위, 조온, 이무 등이 이끌던 지휘부 군대가 모두 투항한 후, 궁궐 내 다른 곳을 지키던 나머지 잔존 부대도 전세가 꺾였다는 걸 알고 투항, 모두 무장해제 당한 후 집으로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록에서 묘사되었듯 전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납득이 간다.
또한 다른 방어군은 가별초를 포함한 대군과 대치했다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빠르게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위에서 보듯 반군 측 자체 군세도 결코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확실한 숙위군 지휘관들과의 밀약만 믿고 일을 진행할 순 없으니까. 실록에선 세자 이방석이 연이어 줄지어진 병력을 보고 놀랐다는 듯한 기록이 있다. 계유정난처럼 정말 세력이 약한 상황에서 주저하는 사람들 걷어차 가며 일을 벌였다기보다는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쿠데타였다.
난이 일단락된 후, 신하들이 태조에게 정도전, 남은, 박위 등이 역적이라 죽였다는 문서에 서명을 요구하자 이름을 적고는 토하려다가 그리하지 못하고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은데 넘어가질 않는다."라고 말하며 울었다고 한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은 단번에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2차 왕자의 난도 불만분자의 돌출행동에 가깝고 별다른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 이성계는 상왕이 되어 실권이 없어졌고 새로 왕이 된 정종도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 반면 이방원은 실권을 쥐고 세자가 되어서 공식적인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고 측근들이 조정을 장악했다. 보통 이런 경우 있을 법한 반대 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왕위 등극 후 가장 큰 위협인 조사의의 난조차 초기 진압에 성공했다. 왕위를 사수하는 중 입니다, 아버지!
반면에 태조는 쿠데타 한 번에 너무나 쉽게 무력화 되고 말았다. 여러 면에서 판박이인 견훤의 경우 신검은 쿠데타 후에도 쉽게 정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신검의 쿠데타는 견훤에 충성하는 이들을 숙청은커녕 군대를 맡겨서 전쟁터에 끌고 나올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기반이 취약했다. 견훤이 고려로 망명 후 고려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후백제의 중신들은 견훤을 보고는 별다른 저항없이 투항했다. 하지만 왕자의 난은 쿠데타 과정에서 중신들과 왕실 친인척의 지지를 받았고, 당일에 이복동생 세자를 폐세자 후 살해는 물론이고 이성계의 손발이 될 측근을 모조리 참살해버리고 빈자리에 자기 사람들을 심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궁궐에 고립된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변변한 반격 한 번 못해봤고, 결국 몇년을 벼르고 별러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야 그나마 칼을 뽑아볼 수 있었다. 건국 왕이라는 권위가 있음에도 최측근만 정리되자 중앙에 고립된 건 막내의 세자 책봉과 연이은 큰왕자들의 토사구팽이라는 무리수로 엄청난 지지를 잃었다는 반증이다.
4. 여타 기록 왜곡
1차 왕자의 난에 관해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1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사가 실린 태조실록이 반란의 주동자인 태종 시절에 편찬되었기 때문이고, 실록 편찬 멤버들 또한 직간접적으로 1차 왕자의 난에 가담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이방원의 군사들이 무기가 없어 서로 창을 쪼개어서 들었다고 하고 또 이숙번이 거느린 장사 2사람과 기병이 10명, 보졸이 9명에 여러 군의 종자와 노복 10여명이 동구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어디서 수십명으로 나라를 엎었다는 구라를 치냐고 펄쩍 뛰는 이들이 많은데, 이들은 일단 정안군과 왕자들을 경호하기 위해 궁문 바로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인원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정도. 어차피 같은 기록에서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병력이 쭉 늘어서 있었다고 함께 밝히고 있으며, 원경왕후 민씨가 몰래 병장기를 준비하여 거병을 도왔던 사실도 몇 차례에 걸쳐 언급된다. 사실 공식적으로 사병이 몰수된 마당에 여전히 대대급 이상의 사병을 몰래 육성하고 있었다면 이방석의 친위세력이 이를 감지하지 못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정도전이 맥없이 선공을 허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쿠데타측은 최초에 저 수십명 수준의 경호 인력과 이숙번의 안산군 병력 외에 직접적으로 손에 쥔 병력은 없었고, 거사 직후 동원한 병력은 대부분 몰수되어 재편된지 얼마 안되는 사병 출신의 중앙군과 포섭된 친위군을 주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또한 실록에서는 정도전이 왕자들을 태조의 병을 핑계로 궁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하자 이를 눈치채고 역관광시킨 것으로 서술했으며 이것이 이른바 종친모해죄의 직접적인 명분으로 제시되었다. 심지어 이후로도 잊을만하면 "무인년에 태상왕이 아프시자 정도전 일당이 적자들을 쳐 없애려(이하생략)" 운운하는 기사들이 몇 번씩 나온다.툭하면 이러니까 더 이상하다 이후 월탄 박종화의 세종대왕이나 이를 기반으로 한 용의 눈물, 후의 정도전 등에서 모두 이를 따랐지만 실제 그랬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아무리 정도전이 당대의 알아주는 권신이라지만 명색이 다른 종친도 아니고 태조의 친아들들을 죽이는 일을 태조의 윤허도 없이, 그것도 궁 안에서 저지른다면 그 정치적 파장은 만만치 않은 일이고, 특히 왕자들과 이리저리 얽힌 구파 공신세력들의 반발을 진압하자면 사실상 친위쿠데타 수준의 후속행동이 필요한데 정작 무인정사 당시 정도전파는 실로 맥없이 여기저기서 쿠데타군에게 각개격파당했을 뿐이다. 결국 큰왕자들의 살해 모의는 태조의 윤허 혹은 묵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인데 기록에 나타난 태조는 병으로 누워있다가 급작스러운 반란 소식 앞에 극도로 무기력한 모습만 보일 뿐이다.
당시 궁 안에서 태조를 간호하던 것은 세자의 매형인 흥안군 이제와 태조의 서제인 의안군 이화인데, 이화는 칼 들고 싸우겠다는 이제에게 집안일일 뿐이니 가만 있으라고 구슬릴 정도로 확고한 정안군파였다. 위의 여러 정황들을 보면 경복궁 친위병들 역시 상당수가 이방원 측에 이미 포섭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런 상황에서 왕자들을 죽이려 했다면 당장 정보가 새어나갔을 것이다. 왕자들을 죽인다는 무시무시한 일을 모의하면서 정작 궁 안에 정안군파를 남겨두고 내부단속부터 실패한다는 것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게다가 정작 정안군과 함께 또 다른 최유력 적장자였던 영안군 이방과는 궁밖의 소격전에서 태조의 건강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지 입궁하지 않았다. 남은의 경우는 일단 몸을 피했다가 "정도전이야 어그로 만땅이라 죽었지만 난 괜찮겠지" 하면서 정안군을 찾아갔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무려 살해모의까지 해놓고서 미움받을 짓을 안 했다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력으로 가능할 일일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와 관련하여 하륜의 졸기에 꽤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다. 해당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전략) 그때에 정도전이 남은(南誾)과 꾀를 합하여 유얼(幼孽)을 끼고 여러 적자(嫡子)를 해하려 하여 화(禍)가 불측(不測)하게 되었으므로, 하윤이 일찍이 임금의 잠저(潛邸)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하윤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써서 이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윤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에 하윤은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있었다. 빨리 말을 달려 서울에 이르러 사람으로 하여금 선언(宣言)하고 군사를 끌고와 도와서 따르도록 하였다. (후략)
즉 이방원이 "쟤들이 자꾸 우릴 죽이려고 하는데 어쩌지?"라 묻자 하륜이 "선빵필승 ㅅㄱㅇ. 아들이 그냥 뒈질 수 없어서 애비도 아니고 애비의 군사만 치는건데 그게 뭐 문제겠음?"라고 대답한 것이다. 하륜은 1398년 8월 초에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갔으니 이는 적어도 무인정사가 일어나기 1달 전에는 있었던 대화다. 이를 보자면 이 사태를 이방원 측의 잘 준비된 선공과 계획된 누명으로 해석할수도 있다. 궁에 갔다가 돌아온 이방원이 "야, 쟤들이 나 죽이려고 해. 빨랑 애들 모아!"라고 한다고 해서 무전기 같은 게 있던 시절도 아니고서야 한두시간만에 갑자기 여기저기에 흩어진 수천의 병력이 뚝딱 - 그것도 사병이 혁파된 마당에 - 모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도전 측이 아주 결백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선 하륜의 합류시기가 미묘한데, 만약 이방원의 거병이 잘 준비된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면 하륜은 졸기에 나온 것처럼 혼자 상경하여 후속병력의 합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정도전에서처럼 충청도의 대군을 이끌고 당일 밤부터 주력을 맡아야 했을 것이다. 정작 무인정사 당일 기록에는 하륜은 행적은 고사하고 아예 이름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며 거병 4일이 지난 9월 1일에서야 정당문학으로 임명되면서 재등장한다. 또한 갑자기 병력이 준비되는 것도 숙위군이 이미 포섭되어 있다면 어려울 일은 없다. 미리 계획을 입수하고 한성 상주 인원에게 준비시켜두면 그만이니까. 이와 관련하여 실록에서는 정도전 일당이 송현방 남은의 첩 집을 밤낮으로 들락거리고, 이화, 이무 등이 계획을 알려주며, 박포가 정도전 진영을 정탐했다고 서술하는 등 어떻게 이방원이 계획을 알 수 있었는지를 매우 자세하게 적고 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거병일의 결정과정이 한성의 병력은 동원이 가능하지만 충주의 충청감영에는 다소 늦게 통지되는 방식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으며, 하륜이 8월 26일 단기로조차 합류를 못한 정황을 고려하면 8월 25일에서야 확실한 정보를 입수하여 거병이 결정되었다고 해도 이상할것은 없다. 반군의 중추가 될 수 있는 하륜의 합류를 포기할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다는 증거다.
왕자살해음모를 긍정하자면 결국 정도전은 왕의 윤허도 없이 왕자들을 죽이려 하면서, 피아 구분도 못하고, 보안유지도 실패했으며, 심지어 현장 지휘조차 손을 놓은, 그야말로 작전의 병신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이 재능으로 요동정벌??? 문제는 실록에 따르면 이게 정도전 혼자 준비한 게 아니라 남은, 심효생, 이무, 이근, 장지화, 이직, 이제 등 송현방 멤버들이 함께 준비했다는 것.집단지성의 멸망 하여간 실제 살해계획이 있었는지와는 별개로 이방석의 친위세력이 왕자들을 살해하려 한다는, 혹은 살해할 것이라는 예측 자체는 이미 세간에 파다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어차피 막내의 세자책봉이라는 초유의 명분제로 승계시도는 큰왕자들의 존재와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며, 특히 능력, 세력, 야심의 3박자를 모두 갖춘 이방원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위에서 이방번이 세자 자리에 욕심을 부렸다는 언급도 있었지만, 같은 기록에서는 이방원이 이방번에게 "걔들이 너는 가만 둘 것 같냐? 우리 다음엔 네 차례인데 지금이라도 같이 가자."고 구슬렸다는 대목도 있다.
당시 경복궁 숙위병 사령관은 이방석이었는데, 당연히 이에 대처를 하려고 했지만 저항을 못했다. 숙위병의 수가 적어 중과부적으로 밀려서 변변한 전투 한 번 치르지도 못하고 제압당했든지, 아니면 숙위병들마저도 창을 거꾸로 잡았든지, 그도 아니면 숙위병이 대처하기도 전에 반란군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여하튼 이방원 측에서 적지 않은 병력을 동원해 급습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또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 실록에서는 정안대군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처형되었다고 나와 있으나 이 역시 왜곡되었을 공산이 크다. 자세한 얘기는 정도전 문서를 참조할 것.
실록의 1차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승정원일기마저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초기에 해당하는 기록들이 불타버려서 정확한 사실에 접근하기는 아직도 요원하다. 사실 승정원일기라고 조작 없이 멀쩡했을지도 의문이지만.
5. 태조의 병환
5.1. 태조 병환 조작설
태종이 반란군을 이끌고 가장 먼저 제압한 곳은 정도전과 친구들이 놀고있던 술집이 아니라 태조가 기거하고 있던 경복궁이다. 실록에는 태조가 당시 와병 중이었다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반란군들에게 체포, 구금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태조는 1차,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아주 건강하게 지냈으며 조사의의 난 때는 태종을 겨냥해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하기도 하는 등 와병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당시 왕자의 난 전후한 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조의 병환에 대한 기록은 총 6번인데, 태조 7년에 무려 5번이 몰려 있고 그 중에 왕자의 난이 발생한 8월에 4번이 몰려 있다. 그런데 8월 아파서 누웠다는 사람이 3일 만에 흥덕사에 가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모순된 기록이 보이고, 태조가 아팠다면 아내 신덕왕후 때처럼 거처를 옮긴다든가 대사령이나 불공처럼 회복을 기원하는 행동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1차 왕자의 난 직전 태조의 회복을 위한 행동은 오로지 영안군 이방과가 태조의 건강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는 것 하나뿐이다. 그리고 정종에게 선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건강 문제임을 봐서는 태조의 와병은 조작이고 태조가 구금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는 논리다.
당시 태조의 나이가 언제 갑자기 급사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나이(62세)이고, 요동 정벌을 앞두고 있는 비상한 상황인 시기인 것도 모자라 태조가 몸이 아픈데 재상이자 의흥삼군부사로서 군권을 모두 틀어쥐고 있던 정도전이 밖에서 술을 마신다? 태조가 아프면 병환의 중한 정도를 떠나 즉각 입궐해 상황을 살펴야 하는 정도전이다. 대응력이 떨어질 정도의 상황으로 태조에게 병환이 있었다면 그 전에 이미 정도전은 경복궁에 들어가 상황을 살피며 계엄령을 선포할 것인가 저울질하고 있었을 것이다.
실록에 나와있는 것처럼 태조가 걸핏하면 골골대며 자리에 누워버렸다면 상왕이나 태상왕으로 물러났을 때 심심하면 사냥을 나가거나 타 지역으로 유랑을 갈 수 없었을 것이고 조사의의 난 때 군대 지휘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죽기 몇 년 전에 딸을 얻을 정도로 매우 건강한 사람이 태조였다.
5.2. 반론
실록의 기록을 믿는다면 태조가 진짜 아팠다는 쪽에 힘이 실린다. 태조가 하필이면 그날만 앓아누웠다 하더라도 무인정사 당시 태조의 나이(64세)라면 한 번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겉보기에 건강해도 어느 날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게 노인들 건강이다. 일례로 1994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을 당시, 직접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보고 온 지미 카터는 그가 건강하다고 평가했지만 서울에서 TV화면으로만 김일성을 본 김영삼은 그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바로 간파해냈고 김일성은 그로부터 보름도 안 되어 죽었다. 김영삼의 아버지가 김일성과 비슷한 연배(김일성은 1912년생, 故 김홍조 옹은 1911년생)라서 노인의 건강상태를 살피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 20세기에 온갖 호사를 누리며 산 독재자가 이런데 하물며 15세기의 60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르신을 모셔봤다면 어딘가 문제가 생겨서 수술하고 한 5~6년, 길게는 10년까지도 건강히 지내시다가 다시 건강에 문제가 생겨 수술하거나 장기입원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태조의 사례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아무리 실록에 윤색이 되었다 해도 앞뒤의 기록과 교차해보면 어느정도의 신뢰성은 검증할 수 있는데 이 건이 바로 그런 예이다.
태조는 2년 전인 1396년에 그토록 사랑했던 신덕왕후의 급사라는 충격적인 비극을 맞이했고, 슬픔으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황에서 신덕왕후의 장지를 찾기 위해 직접 수도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등 꽤나 무리를 했다. 배우자의 사망은 당사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사안으로, 특히나 그 사망이 급작스럽거나 비참하다면 젊은 사람도 하루만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다. 애처가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사망한 사례는 군주들 중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강건한 군주였던 청태종조차 사랑했던 후궁 하르졸(해란주)이 사망하자 이후로 2년간 실의에 빠진 채로 지내다가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앉은 채로 급서했을 정도였으니 이미 환갑을 넘긴 태조라면 피를 토하며 쓰러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세자의 가장 든든한 배경이 되어줘야 할 신덕왕후의 죽음으로 이성계가 직접 나서서 후계구도를 공고화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는데 위에서 보듯이 신덕왕후의 친척들조차도 이방석의 승계에 그다지 긍정적인 입장이 아니었으며, 정도전이 추진하는 되도 않는 요동정벌과 사병혁파 정책 덕에 조정 내의 분열과 대립이 개국 이래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었으니 스트레스가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실록에 기록된 태조의 병환은 난이 일어난 그때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라 1398년 내내 꾸준히 등장한다. 후일 태조가 건강했다 한들 그 당시의 병환을 의심하는 건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실록 기록을 보면 예전의 씩씩했던 태조치고는 너무 무기력해보인다. 다만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독한 상태라면 정도전 일파가 그렇게 술이나 마시면서 있을 가능성은 없으니 중병까지는 아니었고, 단지 며칠 푹 쉬고 약 잘 먹으면 완쾌될 정도라서 회복에 집중하느라 태조의 대응력이 떨어진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태조가 대응하고 싶어도 병환 중 태조를 대신할 인물이 없고 경복궁이 장악된 상태라서 태조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을 공산이 크다. 술 마신 다음날의 숙취나 무리하게 움직인 다음날의 몸살같이, 꼭 중병이 아니라도 젊은 사람조차 걸렸을 때 무력화 되어서 자리보전해야 하는 병은 있다. 태조 역시 처방 잘 받고 하루이틀 푹 쉬면 나을 잔병이 걸리지 말란 법은 없다.
당시는 음력 8월 말로 양력으로는 10월 초에 해당하는 환절기였기 때문에 국사나 군무 등으로 조금 무리했다면 심한 감기몸살이 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기다. 게다가 이 해 하반기에는 계속해서 폭우가 내리고 우박이 쏟아져 법석(법회)을 열게 하는 등 날씨도 영 좋지 않았다. 어디 거동이라도 잘못 했다면 꼼짝없이 몸살나기 딱 좋은 상황이다. 실제로 7~8월 태조의 행적을 보면 병이 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데, 7월 27일 폭풍이 불고 우박이 내리던 날 태조가 흥천사에 거둥하고 바로 이틀 뒤인 29일에 5월 이후 3개월만에 병이 났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후 8월 3일과 6일 잇달아 병이 난 직후 8월 9일 흥천사에 거둥했고, 13일에 세자 이방석이 길복을 입고 정릉을 지키던 이서와 강인부를 표창한 다음날 14일에 다시 태조의 병환 기사가 나온다. 이로 미루어보면 7월까지 중국 사신 접대 등으로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에서 7월 말 궂은 날씨에 무리해서 외출을 한 태조가 감기몸살이 들었고, 완치되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해서 국사와 신덕왕후의 3년상 마무리 등으로 무리하다가 증세가 도지기를 8월 내내 반복했다고 추측해도 크게 무리는 없으며, 이렇게 병세를 질질 끌고 있는 상황이니 이방원 측에서 궁내 지휘관들을 포섭하고 날짜를 잡을 틈을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병의 시발점이 하필이면 정릉 원찰인 흥천사 거둥이라는 점이 참 얄궂다고 하겠다. 태조의 병은 9월 초에 수정포도를 구해 먹으면서 점차 회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미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 측에게 실무를 떠넘기고 양위까지 하면서 분노와는 별개로 그동안 격무에 시달렸던 몸이 자연스레 회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도전 측이 태조의 병환에 기민하게 대응하기에는 오히려 이제는 정말 이방석이 즉위할 각이 나와서 뭐라도 한바탕 안 하면 끝장이다라는 시그널을 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사실 7월 말부터 내내 태조의 병이 도지고 낫고를 반복한 상황이라 매번 경복궁에서 숙위했다간 정도전부터가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정도전 측이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이미 사병이 혁파되어 중앙군으로 편입되었고, 왕자 및 종친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그 결과가 미흡하다 하여 그 휘하 사람들에게 태형을 내린 것이 약 2~3주 전이었다. 즉 이미 삼군부의 군령이 왕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미치는 상황이었으며 세자의 동복형인 이방번에게는 상당한 규모의 사병을 들려놓았으니 나름대로는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태조가 앓아누워있긴 하지만 역전의 용장인 박위가 궁내에 있었고 삼군부 절제사를 지냈던 흥안군 이제가 입궐해 숙위중이었으며, 자신이 열심히 키워놓은 만16세의 세자가 궁궐 친위병 정도는 충분히 지휘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혁파해서 모아놓은 중앙군과 이방번이 아무 도움이 안 될줄은 몰랐을 것이다.
만약 태조가 멀쩡한 상태에서 쳐들어왔다면? 그냥 아들이고 뭐고 거기서 끝났다. 태조가 아무리 늙어도 신궁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무인 출신이라 반란 진압은 쉬웠을 것이다. 태조 개인의 무력이야 노령으로 인해 쇠퇴했다 쳐도 그는 무인정사보다 더한 아수라장을 수없이 돌파해온 경험이 있다. 그는 스스로 반란을 일으킨것은 물론이고 자신에 대한 수많은 도전을 물리쳐가면서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반란군이 궁으로 몰려오는데 뒤에서 자신들의 주인이 문 닫고 맞아 싸우라고 명령하면 가별초가 누구 말을 듣겠는가? 왕자들이 가별초를 포섭한다 한들 자신들의 주인인 왕이 병들지도 않고 멀쩡한 상태에서 체포, 구금하라는 주문을 목숨이 10개가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동의하겠는가? 심지어 흥안군 이제는 직접 시위병력을 이끌고 나가 싸우겠다고 했지만 함께 있던 이화의 만류와 태조의 부동의로 실패했다. 태조의 기력이 충분한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이제가 반격을 시도해봤을 것이고 실록 혹은 연려실기술같은 야사에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태조실록은 음모론자들이 막연히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무인정사 이전까지는 세자책봉의 책임이 정도전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있었음을 밝히는 등 생각보다 윤색이 적은 물건이다. 더군다나 멀쩡한 태조를 힘들여 구금할바에야 차라리 모든 문제의 시발점인 정도전을 몰래 암살해버리는 게 훨씬 견적이 나올 일이다.
위에서 의문점으로 제시한 조사의의 난은 오히려 무인정사 당시 태조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좋은 반례가 된다. 이미 무인정사로부터 4년이 지났고 아예 이방원이 왕위에까지 올라 그야말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된 이성계였지만 순식간에 1만의 병력을 모아 내전을 일으킨 것이 바로 이성계의 권위였다. 권위가 너무 막강해 신병이 확보되자마자 난이 끝나버렸지만 하물며 현역 군주인 그가 난을 감지하여 반군 앞에 상방검을 들고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반역죄로 삼족을 멸할 일이다. 의심하는 쪽에서는 태조가 그렇게 아팠다면 어떻게 여기저기를 그렇게 쏘다니며 함흥까지 올라가버릴 수 있었겠냐며 의문을 제기하는데, 반대로 멀쩡한 상태의 태조를 강제로 구금해 난을 성공시킨 것이라면 오히려 그대로 궁 안에 유폐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태조가 거동을 할 수 없다고 열심히 둘러대도 모자를 일이다. 태종이 이성계의 무기력함을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면 사신을 접대하고 흥천사에 불공을 드리러 다니고 평주(평산)니 낙산사니 신도(한성)니 오만 곳을 쏘다니도록 놔뒀을 리가 없다.
명분 면에서도 무인정사는 다른 반정들과 크게 차이가 나는데, 직접적으로 왕을 폐위시켜버린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은 아예 왕을 폭군으로 지목해버렸지만 무인정사 지도부는 창업군주이며 친아버지인 태조를 상대로 폭군의 ㅍ자도 꺼내지 못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임금 옆의 간신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계유정난과 비슷하겠지만, 그 계유정난 때에도 수양대군은 어리디 어린 단종을 압박하여 양위를 받는데 무려 2년의 시간을 소비했다. 반대파 다 조져서 조정 다 장악해놓고도 어린 왕을 상대로 이 정도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몇 년 후에 애까지 낳을 정도로 기력이 충분한 창업군주 친아버지가 멀쩡한 몸으로 반란군 앞에 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아무리 사대부와 종친들이 이방원을 지지하며 몰려왔다고 해도 가별초를 이끌고 당당히 나타난 이성계의 면전이라면 이방원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한줌 부자의 정에 의지해 폐서인을 목표로 하는 것 뿐이었다. 특히 조준 같은 주요 관료들이 한 번 머뭇거린 것을 제외하고 생각보다 순순히 따른 것을 보면 이들도 태조의 병환으로 경복궁이 쉽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데 무게가 실린다.
태조가 병환중이었음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는 바로 거병시기다. 전술했듯이 이 사건은 사병이 혁파된지 약 10여일이 지난 시점에서 터졌는데, 상식적으로 거병을 시도한다면 사병을 손에 들고 있는 상황이 사병이 몰수된 상황보다 훨씬 쉬울 노릇이다. 거병과 거의 동시에 경복궁을 장악할 정도로 주도면밀하게 일을 진행한 이방원이 사병의 유지를 포기하면서까지 기다릴 조건이라면 오로지 태조의 병환과 그로 인한 경복궁의 유고상황 외에 다른 답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사병이 이미 몰수된 이방원에게 궁궐수비군이 내응할 이유 역시 태조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찾을 수가 없다. 각종 야사나 음모론이라면 환장을 하는 대한민국 방송작가들이 유독 무인정사만큼은 태조의 와병 상황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 외에 도저히 개연성 있는 전개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방원 일파가 마침 태조가 가벼운 병치레 탓에 이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다. 따지고보면 태조가 신속하게 밀어붙인 위화도 회군과 비슷하게 1차 왕자의 난도 신속하게 펼쳐졌다.그리고 실의에 빠졌던 몸이 분노의 힘으로 일어섰다
여담으로 과거 이 항목은 드라마 정도전이 종영된 이후 기레기들에 의해 토씨 하나 수정되지 않고 무단 도용되었다.(...)기사 1, 기사 2 지금은 항목에 수정이 좀 가해진 상태.
6. 1차 왕자의 난을 다룬 사극
뭐니뭐니해도 용의 눈물이다. 1차 왕자의 난을 대단히 스펙타클하게 그려냈으며 정예 병사들이 입고 있는 경번갑도 볼거리. 세자 방석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이라고 이방원은 눈치를 보냈고, 방번과 이제는 함께 그냥 보내주었으나 이들은 뒤쫒아간 이방간에게 제거된다.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서는 실록의 상반된 기록을 참고하여 의미 있는 모습을 그려냈다고 평가받는다. 여기서 태조는 기록에 따라 병으로 인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던 상황으로 등장. 나레이션에서 이방원은 딱히 동생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주변에서 멋대로 죽여서 화가 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였다는 기록을 언급하며 어디서 설득력 없는 소리를 하냐고 디스한다.
다만 한명회의 살생부 씬을 가져다 쓰는 바람에 실제 왕자의 난 전개 과정과 차이가 생겼다. 본시 남은의 첩실 집에 모여있던 인물은 정도전, 남은, 심효생은 물론이고 장지화, 이근, 이직, 이무 등 다수였는데; 극중에서는 정도전, 남은, 심효생만 있는 것으로 묘사했고 본시 이 자리에서 죽는 장지화, 이근은 입궐하란 명을 받고 궁문에 들어섰다가 이숙번이 살생부에 줄을 긋는 것과 동시에 무사들의 철퇴에 맞아죽는 걸로 바뀌었다. 본시 습격 현장에서 하인 복색으로 변장하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 이직도 궁문을 들어서다 맞아죽는 오류가 나왔다. 다행히 이직이 비중이 크지 않았기에 남은의 형 남재와 함께 이방원을 찾아가 등용되는 장면으로 은근슬쩍 부활시킬 수 있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정도전의 최후를 장식하는 사건이기에 최종화로서 이 사건을 다룬다. 이방원이 죽이자, 제거하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등 싹수를 보이기도 했지만, 이방원은 거사가 일어나기 전에 정도전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상황에서 하륜의 충청도 병력이 올라오는 것을 계기로 무인정사를 일으킨다. 태조는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훈련 덕에 무리를 하게 되면서 자리에 눕게 되었으며, 도당 내에서 정도전의 우군이 없었기에 이지란이나 조준 등 이방원에게 호의적이라 볼 수 없는 사람들도 결국 이 사건을 방조하거나 받아들인다. 작중에서 정도전은 도망치지 않아 억류된 뒤, 이방원에게 '재상정치에 대한 포기를 대가로 모든 정책을 받아들이겠으니 내 부하로 들어오라'고 회유를 받으나 거절하고 참살당한다. '정도전은 도망치다 붙잡혀 애원하다가 살해당하였다'고 태조가 이방원에게 왜곡된 사실을 듣는 장면이 나오면서 양자택일이 아니라 두 설을 모두 채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을 맡았던 유동근은 정도전에서는 태조로, 용의 눈물에서 세종 이도 역을 맡았던 안재모는 정도전에서 이방원으로 출연한다(…).
2015년 3월에 개봉했던 영화 순수의 시대 또한 이 사건을 다루는 작품이다. 여기서는 장혁이 이방원을 맡았는데 영화 자체의 평가는 나빴어도 장혁의 킬방원(…) 연기는 괜찮았다는 평가.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47회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졌다. 일단 태조 와병설을 택한 듯, 태조는 등창에 걸려있었다. 물론 다른 드라마들과 달리 물흐르듯 진행되지 않고 이래저래 삐걱거리는 순간이 많았지만 운좋게 요동 출정이 연기되고, 안산군수 이숙번의 병력이 예정대로 이방원 병력과 합류했다. 그리고 이방원 - 이방간의 사병은 정도전 일행이 머무르던 송현방(남은의 별장)을 피바다로 만들며 정도전, 남은을 제외한 주요 인사들을 모조리 주살하고 그에 이어서 삼군부를 공격하여 그곳을 그들의 통제 하에 놓이게 하였다. 물론 정도전의 경호원인 이방지를 떨어뜨려 놓아 방해요소를 제거한 상태. 그리고 결국은 성균관 대성전으로 피신한 정도전을 이방원이 직접 주살해버린다. 48회에서는 남은이 도망치다가 죽임을 당하고 이방원은 궁으로 진격하여 세자 이방석도 참살한다. 한편 이방석의 형 이방번은 정황상 이방간이 죽인 것으로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