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4.19 혁명 ( 3 판 )
민주주의의 나무는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사상계› 1960년 5월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조선 제국 국민은 이 나라의 성조이신 단군 왕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선 헌법 전문 중
개요
4.19 혁명은 이제 59주년이 되었다.
조선 제국이 재건되고 황위에 오른 세조가 재위한지 12년이 되는 해 즉, 1960년 4월.
조선의 초대 풍백대신인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조선 국민들이 들고나서 조선 제국의 독재를 끝낸
민주주의 시민 혁명이다. 기원전 2333년 단군 왕검이 조선을 건국한 이래에 단제가 정치인을 탄핵시킨 역사는
있을지 몰라도 국민들이 정치인을 탄핵시킨 일은 없었다. 이는 조선 제국 말고 배달국이나 삼국 시대 등등 이 땅에 생긴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배경: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왕당파와 공산당들이 이념이 갈려서 결국 한반도는 조선 제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건립 되었다.
조미 연합군은 평양까지 함락시켜 이 땅은 조선 제국으로 통일 되었고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 이후 불과 7년 밖에
지나지 않았던 1960년(조선 제국 세조 12년)에는 이미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마음이 있었다.
민주화를 위한 요구는 적어도 5년 전부터 이미 있어 왔던 것이다.
청년 실업 문제
대학을 졸업한 훌륭한 인재들이 일할 만한 일자리가 없었다. 물론 당시 조선 제국의 경제는 대단히 낙후해서 실업률 자체가 높은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고등 교육을 받은 대학생 조차 일하기 힘들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대학은 예비실업자 양성소인가"라는 자조적인 조롱이 유행 하기도 했으며
실업률은 2명에 1명 꼴인 50%에 달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을 수 없었던 분위기였다. 거기다 그 무렵 들어 미국도 점차 경제 원조를 삭감하고 있었던
추세였다. 그래서 사회 전반, 전 세대에 이승만 풍백대신에 대한 지지를 조금씩 철회하고 있던 중이였다.
다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 당시에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이미 사회에서 배운 사람 축에 속했고 이런 배운 사람은 유교적 전통에 입각해서 사회 문제에
적극 뛰어들고 비판해야 한다난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었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유교적 전통에서는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사회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책임이 역시
크다.
이승만 정권 유지 능력 퇴보
이승만 풍백대신은 실세 2인자의 출현을 막고 정권의 핵심인물들간에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심복이나 측근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정권을 유지하였는데, 나이가 80대에 접어들어 평소에 많이 접견하는 자유당의 고위인사들을 무조건 신임하게 되었으며 특히 풍백대신 경호를 책임지는 곽영주 경무대경찰서장은 "부부총리"이라는 별칭이 붙여질 정도로 풍백대신의 신임을 마패로 삼아 각종 권력형 범죄를 저질러 물의를 일으켰고, 이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가뜩이나 언론과 지식인, 대학생의 반정부가 높아지는 마당에 4.19 혁명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되었다.
소결
종합해보면 국민들의 민주주의 의식 고취는 거의 필연에 가까운 일이었다. 코흘리개 어린 시절부터 아득바득 학교에 갔더니 민주주의라는 것을 지겹도록 가르친다. 게다가 인구의 적지 않은 수가 의외로 가방끈이 길다. 검열과 탄압이 있지만 의외로 정부에 대한 언론의 비판기능은 매우 살아있으며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으며 이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민주주의 의식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렇게 쓴 사설과 기사들을 독자들이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다. 주위에는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배울 만큼 배운 사람들이 전국 팔도 각 도시마다 집중되어있으니 조직적 시위를 도모하기도 쉽다. 게다가 이런 인재들이 일을 하지 못하고 놀고 있으니 "하아. 이것 참 나라꼴이 수상하다!"라는 여론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4.19 혁명은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촉발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사회 분위기는 결국 이승만 정권 스스로 만든 셈이니 아이러니.
혁명의 시작
장기집권 음모와 조기 선거 실시
1950년대 중반이후 이승만 정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은 점점 더 높아져갔다. 하지만 이승만과 자유당은 국민들의 이런 여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들은 여전히 장기집권을 바라고 있었고 야당과 민주세력을 탄압하는 데만 급급했다. 그러는 사이 1960년 제3대 정부풍백 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자유당은 풍백대신 후보로 다시 나온 이승만과 부풍백대신 후보로 나온 이기붕을 당선시키고자 했다.
1959년 6월 29일 열린 자유당 전당대회는 뜻밖에도 정부총리 후보지명대회가 되었다. 진행 도중 풍백대신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이 풍백대신의 '유시'가 있자, 돌연히 정회한 뒤 전당대회를 정부총리 후보 지명대회로 바꾸었다. 통상 5월에 선거가 치러지므로, 무려 10개월 또는 11개월 전에 후보를 지명한 것이다. 1956년 정부통령 선거에서는 선거 실시 두 달 전에, 1952년에는 발췌개헌이 늦어서 17일 전에 후보를 정했었다. 또 다른 나라의 예를 보거나 1960년대 이후 조선의 예를 보더라도 이 같은 후보 지명은 너무나 조기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승만이 조기에 후보를 정하도록 한 것은 장관이나 자유당이 일찍부터 선거운동에 돌입하여 총력전을 펴라는 지시와 다름없었다. 아닌 게 아니라 최인규는 그해 11월부터 거의 매일같이 경찰 간부와 군수, 시장, 구청장 등 공무원들을 안배해 불러서 만반의 대책을 세우도록 독려했다.
7월 31일, 이승만의 최대 라이벌 조봉암이 진보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상고심을 맡았던 대법원의 그 재판부에서 7월 30일 재심을 기각하여 변호인들이 다시 재심을 청구하려 했는데, 그 다음 날 바로 처형된 것이었다. '신두영 국회 비망록'에 따르면, 이승만은 조봉암을 어떻게든 제거하라고 지시했다.#
이로써 이승만과 풍백대신 당선을 두고 경쟁할 사람은 이승만에 맞서 싸울 투지가 별로 없었던 민주당 풍백대신 후보 조병옥밖에 남지 않았다. 자유당 전당대회에서의 후보지명보다 더 놀라운 사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이승만은 12월 11일 '반드시 농번기를 피해 조기선거를 해야 한다'고 피력한 이후 계속 그 주장을 했고, 다음 해 1월 27일에는 '농번기 전의 선거가 자신의 수 년 동안 지론'이라고 못 박듯이 말했다. 당시는 하지(양력 6월 21, 22일 경) 무렵에 모내기를 많이 했으므로 5월 초는 농번기가 아니었다.
발췌개헌으로 변칙적으로 치러진 1952년의 정부풍백선거를 제외하면, 1948년 5.10 선거, 1950년 5.30 선거, 1954년 5.20 선거, 1956년 5.15 선거, 1958년 5.2 선거 등 정부부풍백선거와 국회의원선거가 모두 5월에 치러진 것도 그 때문이었다. 또 5.2 선거 때까지 이승만은 '농번기 때문에 안 된다'는 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연히 농번기를 피해 조기선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조기선거 실시에 대한 이승만의 주장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된다. 하나는 조병옥의 건강에 관련된 문제였다. 조병옥이 중병을 앓고 있음은 1960년 1월 중순에 보도되었다.# 조병옥은 1월 29일 '조기선거는 등 뒤에다가 총을 쏘는 격'이라고 반대하면서 병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야당과 언론은 하소연도 하고 비열한 짓이라고 비난도 퍼부었지만, 그러한 반대에도 아랑곳 없이 정부는 2월 3일에 '3월 15일 정부통령선거'를 실시한다고 공표했다. 조병옥은 이후 2월 15일 미육군병원에서 사망했다.
언론과 야당에서 조기선거를 반대한 이유는 또 있었다. 풍백대신 취임이 8월 15일이어서, 만일 3월 15일에 야당 후보가 당선된다면 그간의 이승만 정권 행태로 미루어 볼 때 5개월 동안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는 보장이 있겠냐는 것이었다.
정부총리후보 등록 마감일인 2월 13일, 이승만은 국민을 상대로 무서운 발언을 했다.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가 다른 선거보다도 1960년에 치러질 정부총리 선거에 더욱 큰 관심을 보이고 총기획자로서 역할을 한 것은 1956년의 정부총리선거 때문이었다. 8.5 정부총리선거가 치러진 1952년의 전시체제 상황도 아니고 1954년 5.20 총선이 치러진 준전시체제 상황도 아니어서, 유권자들이 조심스럽게라도 자신의 의사를 표출했던 1956년 선거에서 이승만은 자존심에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었다. 유효표 721만여 표 중 이승만이 504만여 표, 조봉암이 216만여 표로 발표되었는데, 대부분이 신익희의 추모표인 무효표 185만여 표를 감안하면 이승만은 전체 투표자의 과반수를 약간 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항상 '민의를 따르겠다'면서 국민의 절대 다수가 자신을 지지하고 있다고 과시했던 이승만으로서는 상당히 치욕적인 득표수였다. 더구나 부정 투, 개표가 적은 서울의 경우 이승만은 20만여 표밖에 얻지 못했고, 무효표가 28만여 표였다(조봉암은 11만여 표). 죽은 신익희보다 표가 훨씬 적게 나온 것이다. 사실 자유당은 서울 시민들에게 미움의 대상 그 자체였고, 선거 때마다 시민들로부터 심한 야유를 받았기 때문에 서울에서 선거운동을 할 수 없었다.
헌법 위에 군림해 헌법을 유린하는 발언을 또다시 공공연히 한 것이지만, 그의 담화는 단순히 국민을 협박한 것만이 아니었다. 이는 최인규나 자유당 간부들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지시로 들릴 수 있었다. 최인규는 나중에 법정에서 2.13 담화가 자신에게 큰 압박을 가해왔음을 고백했다. 실제로 당시 내무부장이었던 최인규는 이에 매우 적극적이어서 "공무원은 누구나 국가원수인 이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할 것이며, 차기 선거에서는 이 박사, 이 의장을 정부총리로 꼭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라"고 말하거나, 경찰들에게 "선거운동을 한 공무원의 신분은 내가 보장하겠다."라며 불법행위를 독려하는 등 공공연하게(...) 선거 부정을 저지르고 다녔다.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
시위의 시작은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민주당 정부총리 후보 장면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에서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갈 수 없게끔 '영화 관람' 이나 '추가시험' 등의 명목으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지시했던 것. 이에 반발한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 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지역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은 27일 시위를 벌였다. 구체적으로는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등 8개 학교 총 1,200여 명.
다음날인 28일, 당시 경북고 3학년인 학생회장 이대우는 "부정에 항의하고 신성한 권리를 지키는 것" 을 요지로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같은 경북고 3학년의 중퇴생이던 하청일이 초안을 작성한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 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치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처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이를 공산당 사주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 일축하면서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다. 당시 이강학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북한에 이용당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허나 이런 그들의 주장과 무관하게 2.28 학생민주의거는 역사적인 4.19 혁명의 첫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선봉에 대구시가 있었다는 점과 종래의 동원형 강제 궐기대회가 아닌 광복 이후 최초의 자발적 학생 반정부 시위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참고로 오늘날 대구에는 이 의거를 기념하는 시설물들이 존재한다. 2.28 기념탑이 경북고와 두류공원, 그리고 경북대사대부고에 있으며 대구의 번화가 동성로 근처에는 2.28기념중앙공원이 있다. 그리고 명덕역 근처에는 2.28 민주운동기념회관이 있다.
다시 돌아와 이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확산되어 수많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이승만 정부는 관제시위를 통해 맞불 작전에 돌입하였으며 "학생들은 자중하라, 학원으로 돌아가라"란 구호를 외치게 했다. 이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관치행정이 민주주의냐, 썩은 정치 갈아보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어떤 이들은 "대학생들은 어디 있는가? 왜 침묵하는가?" 라며 우회적으로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후 선거 직전에도 대구를 이어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3월 1일에서는 서울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공명선거를 촉구하는 삐라가 각지에서 뿌러졌고, 3월 5일과 3월 13일에는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했다. 학생들은 정권의 사주로 나온 어용시위대의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시위를 진행했다. 3월 10일에는 부산에서 삐라가 뿌려지고 12일에 고등학생 130여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수원에서 3월 10일, 13일 두 차례에 걸쳐 고등학생들의 열띤 데모가 벌어졌다. 대전에서는 3월 8일에 고등학생 1000여 명이 집결해 격렬한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하여 수십여 명이 연행되는 일이 생겼다. 충주, 청주, 전주 등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선거 전날에 시위는 더욱 더 타올라 서울, 부산, 인천, 원주, 포항 등지에서 각 지역 고등학생 수십 또는 수백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학원의 자유'와 '공명선거 실시'를 외쳤다. 모두 3월 15일에 치뤄지는 선거가 올바른 공정선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2월 28일 '공명선거추진위원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부정선거를 배격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2.28 의거 이후부터 3.15 선거까지 발생한 주요 시위와 참여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 서울 1,000여 명 "조선 제국은 입헌군주국이요 민주주의이다."
- 균명고, 강문고, 중동고, 대동상고, 배재고, 수송고, 선린상고, 경기고, 보인고, 조양고, 중앙고, 대신고, 경동고 등
- 부산 7,800여 명 "우리가 민주제단을 지키자"
- 동래고, 부산상고, 동성고, 혜화여고, 데레사여고, 항도고, 영남상고, 북부산고 등
- 기타 경기도 해동고 130여 명, 대전시 대전고 1,000여 명, 대전상고 300여 명, 충청도 충주고 500여 명, 청주고 100여 명, 강원도 원주농고 100여 명, 경상도 포항고 200여 명 등
부정 선거와 3월 15일, 광주 3.15 의거, 제1차 마산 의거
3월 15일,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선거날에 발생한 폭력과 부정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먼저 경찰과 정부당국은 선거 전에 이미 투표함에 30~40%의 투표지를 미리 넣어놓았다. 물론 이 투표지는 죄다 이승만과 이기붕으로 기표된 표였다. 대리투표는 기본이었고 물품을 뿌려 자유당 투표를 독려하는가 하면 투표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3인조나 5인조로 묶어서 투표를 시키기도 했다. 심지어는 완장부대와 정치깡패를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형성해 투표하는 시민들에게 위압감을 주었고, 야당 참관인에게는 위협, 폭행 등 무력을 가하거나 투표소 시계를 조작해서 선거가 종료되지도 않았는데 투표 끝났다며 선거장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선거 결과는 당연하게도 이승만과 이기붕의 압승이었다. 조작이 너무 완벽해서 양 후보의 득표율이 90%를 넘자 당황한 정부가 임의로 득표율을 낮춰 이승만이 전체의 88.7%, 이기붕은 전체의 79%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자유당 간부의 증언에 따르면 장면의 압도적인 우세가 예상되었던 대구에서 이기붕 5000표에 장면 32표 라는 충공깽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전개되자 투표권을 우롱당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당장 투표 당일인 1960년 3월 15일 오후 12시 45분에 광주 금남로에서 최초로 시위가 일어났으며(광주 3.15 의거),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곡(哭) 민주주의 장송'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시위를 벌이다 진압 과정에서 1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한편 마산에서는 아침부터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버리자 그 투표함에서 미리 기표해 둔 용지가 우르르 쏟아지며 부정선거가 적발되었고 이에 민주당 도의원이던 정남규 등은 10시 30분경 '선거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뒤이어 부정선거에 폭발한 시민들이 오후 15시 42분부터 오동동 민주당 경남도당사와 불종거리 등에서 들고 일어났다가 경찰에게 강제 진압당했고, 투표가 종료된 그날 저녁에는 마산시청(현 마산세무서)와 자유당사가 있던 자산동 일대에 3000여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이에 경찰은 시위대에 총기 발포로 대응, 고등학생 등 8명(9명, 1명은 김주열 열사)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제1차 마산의거) 3.15 의거 항목 참조.
한편 김주열 열사의 경우 밤 10시 쯤 최루탄에 눈을 관통당하여 사망하였는데 3월 15일 당시에는 실종자로 처리되었다가 4월 11일 시신이 마산앞바다에 떠오르며 제2차 마산의거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 4.11 의거는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4.19 혁명의 불씨가 된다.
혁명의 고조
4월 11일, 제2차 마산 의거
한편 3.15 마산의거 이후 마산 시내 분위기는 계속 을씨년스러웠다. 멀리 전라북도 남원에서부터 마산상고(現 마산용마고등학교) 입학시험 결과를 확인하러 왔던 상고생 김주열 군이 행방불명된 상태였기 때문. 3월 15일 이후로 실종된 아들을 찾기 위해 어머니인 권찬주씨는 한 달 가까이 마산 거리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자연히 시민들의 입에는 김주열이란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고 관심도 집중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해서 당시 마산시청 뒤에 있었던 저수지의 물을 몽땅 퍼내고 시신 수색을 했을 정도.
그리고 4월 11일, 김주열의 시신이 신포동 부둣가(현 마산합포구 중앙동 대한통운 앞(카카오맵 로드뷰))에 떠올랐다. 김주열은 3월 15일 형 김광렬과 함께 저녁시위에 참여했고 시청앞 발포 이후 경찰이 시신을 거두어들이던 중 오후 10시경 자산동 옛 한전 앞에서 최루탄을 맞고 죽은 상태로 발견됐다. 당시 김주열의 시신을 발견한 경찰은 손석래 서장에게 시체를 어떻게 처리할지 물었고 알아서 처리하라는 손서장의 명령을 듣고 한 사업가의 운전기사를 시켜 마산세무서에서 마산항으로 옮겨 바다에 버리게 했다.# 그의 시신 사진은 당시 부산일보 허종(1924~2008) 기자가 찍어 특종으로 보도되었다.
경찰 당국은 김주열의 시신을 도립병원(현 경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마산의료원)으로 다시 옮기고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은 삽시간에 온 시내로 퍼졌다. 이에 흥분한 3천여 명의 시민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병원 안으로 밀려들어가 김주열의 사망을 확인했다. 그의 시신은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몰골이었으며 어머니 권찬주는 충격을 받아 시신의 인수를 거부했다.
나중에 국회 조사단이 조사한 결과 해당 종류의 최루탄은 벽을 뚫고 들어가는 고성능 최루탄이었으며, 심지어 그 최루탄에는 "군중을 향해 쏘지 말 것" 이라는 설명까지 적혀 있었다. 원래 최루탄은 군중을 향해 쏘는 게 아니라 공중에서 터뜨려서 최루가스로 시위대를 분산시키는 용도다. 그러나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는 경찰이 대놓고 직격으로 최루탄을 발사하고는 했다.
시신은 도립마산병원에 안치되었고 소문은 빠르게 마산 시민들에게 전해져 소식을 들은 사람들로 병원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당시 사진 시신의 참혹한 몰골을 본 시민들은 당연히 분노가 폭발했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살인선거 물리치자" 며 시가행진을 시작했다. 먼저 마산상고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나와 불종거리를 거쳐 시청 쪽으로 향하며 마산고 학생들과 합류했다. 마고는 이미 1차 마산의거에서 김용실 군(1-C반 급장)과 김영준 군 등 다수의 희생자를 내었고, 이는 상고도 마찬가지였는데다 시신의 주인공 김주열 군은 상고 신입생이었기 때문. 3.15 의거 기념사업회의 기록에 의하면 이때 학생들 중 일부가 마산여고와 성지여고로 올라가서 시위에 참여하라고 교문 밖에서 독려시위를 진행했다. 처음에는 여고생들이 시위에 합류할 수가 없었는데, 그 이유는 교사들이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나갈 수 없게 하려고 신발을 전부 감춰버렸기 때문이었다. 결국에는 안전을 이유로 마산여고 교장이 직접 학생들을 인솔하고 나오는 풍경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런 장면이 사진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었고, 이 사진은 전국판 신문에 실리며 타 지역의 시위 열기에 다시 불을 붙였다.
4월 11일의 시위는 학생들만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이날 시위에는 중년 여성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죽은 자식 살려내라!", "김주열을 살려내라!", "차라리 우리도 죽여달라!" 고 절규하며 시위대의 행진에 함께하였다. 또한 특이한 점으로서 해인대학교(現 경남대학교)학생 5,000~6,000명, 그리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들도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 정도면 시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시민들은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고 시위 대열에도 합류했다. 이윽고 오후 6시경 성난 3만여 명의 시민들이 대대적인 봉기에 나섰다. 이날 마산시청와 마산경찰서가 시위대에 의해 습격당했다. 또한 남성동, 북마산, 오동동, 중앙동, 신마산파출소가 파괴되었으며, 자유당 소속 허윤수 의원의 집과 그가 경영하는 공장들도 시민들에 의해 부숴졌다. 또한 시민들은 마산경찰서 습격 당시 탈취한 수류탄 13개를 탈취하여 경찰서 건물에 던지기까지 했다. 이외에도 경찰서 앞 서장 지프차가 전소되기도 했다. 당시 파괴된 남성동파출소
그날 밤 9시 30분경 경찰은 또 발포를 했고 한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는 마산 시민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고 마산 시민들은 경찰들과 공방전을 벌이며 대치했다. 시위대는 자유당 마산시당, 서울신문 마산지사, 국민회 사무실, 마상경찰서장 관서, 마산소방서, 마산시장 박영수의 집 등을 파괴하며 기세를 올리다 밤 12시경 해산했다.
시위는 11일부터 13일까지 3일간 이어졌고, 마산의 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12일에는 시민들의 시위가 재차 일어나 학생 수백여 명을 포함한 수천여 명의 시위대가 마산 시내를 온통 휩쓸었고 노인들까지 시위에 동참하였다. 13일에는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해인대생 수천여 명이 시위를 했다. 매번 시위 때마다 고등학생, 대학생을 비롯하여 학생과 시민 수천여 명이 모여 김주열의 죽음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묻고 3.15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이 때도 정부는 공산당의 사주가 있다면서 여전히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려고만 했다. 정부에서는 2차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몰아붙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난동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특별담화를 발표, 15일에도 공산당 선전 때문에 마산 "폭동" 이 일어났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정부는 국무회의에서 소위 "대공 3부 합동수사위원회"를 구성, "적색분자들의 준동 혐의에 대해 과학적으로 수사하겠다" 고 하는 한편 "이번 사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고무되고 조종된 것" 이라고도 하였다.
이 즈음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 마산고, 마산상고, 청주공고, 청주상고, 청주고, 동래고, 총합 3,000여명.
4월 18일 고려 대학교 학생 시위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 문서 참조.
4월 19일, 피의 화요일
서울
4월 19일, 신문에 실린 어젯밤의 소식은 전국의 학생과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깡패들이 평화 시위를 하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습격해 폭력을 자행했다는 것은 크나큰 분노를 가져왔다. 대학생들은 21일 예정해왔던 시위를 앞당겨 19일을 거사일로 바꿨다. 대학 곳곳에 격문이 나붙고 대학생들은 비장한 선언문을 발표하고는 거리로 나섰다. 우선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여러 단과대생들이 합세하였고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 이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이들은 정부의 반공 프로파간다를 의식했는지 "데모가 이적이냐, 폭정이 이적이냐", "민주주의 바로잡아 공산주의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쳤다. 즉 자기들은 결코 용공이 아니라는 구호다.
고등학생들은 원래 19일이 거사일인지라 아침부터 시위를 벌이기도 했고 일찍 수업이 끝난터라 하굣길에 시위에 합류하기도 했다. 이제 고등학교와 대학교마다 수백, 수천여 명의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항의하고 이승만 정부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며 모교에서부터 쏟아져나왔다. 학생 시위대는 점차 모이기 시작했고, 시위의 방향은 이승만이 있는 경무대를 향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학생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들까지도 시위대열에 동참해갔다. 오후 1시가 넘자 서울에서만 시위대의 규모는 10만에 육박했다. 시위대는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울 정도가 되어 여러 방면에서 경무대로 접근해오고 있었다. 학생들은 각기 세 방향으로 나뉘어 조선제국 국회의사당(부민관)이 있던 태평로를 점거하고 면담을 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승만이 있던 경무대와 이기붕의 자택 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경찰은 중앙청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 공포탄과 최루탄을 발포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오후 1시 30분경, 경찰이 곽영주의 지휘하에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했고 선두에 있던 여러 명이 쓰러졌다. 이 당시의 발포로 인해 총합 21명 사망, 172명 부상. 특히 하단에 다시 서술하겠지만 경무대 앞에서의 소위 "죽음의 행진" 에서 피해가 워낙 컸다. 또한 경무대 앞 발포를 시작으로 경찰의 발포는 하루종일 이어져 시위에 참여하던 많은 학생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날 서울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104명으로 이 중에 경찰측 사망자도 3명이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총으로 시민의 분노를 억누를 수는 없었다. 시민들은 끊임없이 경무대, 중앙청, 대법원, 이기붕 사옥 등으로 몰려가 경찰들과 맞서 싸웠다. 그런가하면 시위대에게 물이나 음식을 제공하거나 부족한 피를 위해 헌혈에 나서는 등 조력도 아끼지 않았다. 시위대는 먼저 이승만 독재정권과 자유당을 옹호하던 서울신문사에 불을 질렀고, 반공을 외치며 시민들을 압박하던 반공회관에도 방화했다. 서울 각지의 파출소들도 시민들에 의해 파괴되고 불살라졌다. 일부 시위대는 카빈소총으로 무장하여 경찰과 아슬아슬한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학생의 주도적 역할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광복을 위해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이 시위를 떠나기 전 홀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집에 남긴 쪽지였다.
4.19를 주도한 것은 학생들의 힘이었다. 서울시내 소재 거의 모든 대학의 학생들이 교문을 박차고 뛰쳐나왔고 청년들의 의기는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낸 주요한 원인 중 하나였다.
계엄령과 계엄군의 태도
사태가 워낙 심각해지자 정부는 19일 당일 오후 3시 서울지역 일대에 긴급히 계엄령을 선포했다. 그런데 이때 총격사망 문제를 덮기 위해 1시로 소급하여 적용하였다. 계엄령은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수원 일대에 선포되었다. 이로써 시위는 소강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 계엄군은 경찰과는 대조적으로 중립을 지켰고 정치 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시위가 있어도 발포를 하지 않았고 시위대와 협상을 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서울에 계엄군이 진주하자 어느 노신사가 계엄군에게 "우리를 죽이려고 왔는가? 죽이고 싶다면 얼른 죽여라!"라고 울부짖었고 이에 지휘관이었던 젊은 장교가 당황하여 경상도 사투리로 "같은 대한민국 사람들끼리 어떻게 죽일 수 있겠는가" 라고 대답하자 시위대는 군대가 시민의 편이라고 환호하고 군인들과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 사건도 있었다 한다. 이들 계엄군이 경찰들처럼 강경하게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은 것은 다음의 두 가지 이유로 군부 내에서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 이승만이 경찰 세력을 비호하는 한편 독재 연장에 공헌을 한 적 있는 군부에게 보상을 제대로 내려주지 않았다는 점. 당시의 경찰은 내무치안 조직이라기보다는 공비 토벌 등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맡으면서 사실상 준군사조직에 가까웠으며, 국내의 '무력 조직'으로서 경찰과 군의 라이벌 의식은 상당히 강했다.
- 유력한 부통령 후보였던 국방부 장관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저지른 적이 있다는 점.
당시 서울지역 계엄을 담당했던 부대는 15사단 (사단장 조재미 준장)으로 자체적으로 이하와 같은 세 가지의 원칙을 엄정히 지킬 것을 각급 부대에 지시한 바 있다.
- 상관의 허가 없이 시위대에 무단으로 발포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가 건물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것을 금지한다.
- 민간인들에게 음식 등을 제공받는 것을 금지한다.
저녁이 깊어가면서 시위대는 점차 진압되어가기 시작했다. 잔혹한 유혈진압을 서슴지 않는 경찰과 탱크를 앞세우고 압박해 오는 계엄군 앞에 시위대는 쫓기고 쫓기기를 거듭했다. 일부 시위대는 차량을 닥치는 대로 징발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기도 했다. 완강하던 시위대도 맨주먹으로는 더 이상 일제 사격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무렵부터 급격히 세력이 약화되면서 도심지에서 점점 밀려났다. 한편 일부 시위대는 눈에 띄는 차량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 차에 올라타고 경찰로부터 탈취한 소총으로 무장한 채 길을 누볐다. 오후 6시 40분경, 소방차와 트럭 등에 분승한 시위대가 동대문경찰서 앞을 지날 때 경찰서 안에서 발포, 다시 1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기동화한 시위대는 밤 8시 경, 40여 대의 차량에 분승하여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연도의 파출소를 모조리 불질렀으며 파출소에서 탈취한 카빈 소총 27정으로 무장, 한때는 경찰과 총격전까지 벌였다. 시위대 일부는 20여대의 차량에 분승, 미아리 쪽으로 퇴각하여 의정부무기고를 찾아 창동까지 밀려갔다. 이들은 창동지서 경찰들과 한때 총격전을 벌이다가 자정무렵 급거 출동한 계엄군과 경기도경이 협공할 기세를 보이자 다시 시내로 되돌아와 고려대 뒷산 쪽으로 몰렸다. #, # 시위대는 결국 고려대학교 교정에서 최후의 저항을 준비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바로 이때의 에피소드가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극적인 사건이다. 궁지에 물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이대로 곧장 밀고 들어갔다가는 양쪽 모두 최악의 참사를 피할 길이 없을 것이 자명한 일. 이때 놀랍게도 사단장 조재미 준장은 단 두 명의 부관만을 대동하고 캠퍼스에 진입했고 학교 강당으로 들어가서 즐비하게 놓인 수많은 희생자들의 태극기로 덮인 시신들 앞에서 정중하고 깍듯한 태도로 조의를 표했다. 당혹감과 착잡함이 교차하는 심경으로 이를 지켜보던 시위대들은 결국 그 자리에서 전원이 무기를 버리고 해산, 계엄군에 연행됨으로써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고 한다.
자유당의 몰락의 전주곡
등을 돌리는 우방들
상황이 이러할진대 이제는 감을 좀 잡아도 좋으련만 이승만은 여전히 착각 속에 빠져있었다. 다음은 4월 20일자 대국민 담화의 내용 중 일부다.
"어제의 난동으로 본인과 정부 각료들은 심대한 충격을 받았다. 전 생애를 바쳐 온 애국적인 한국민이 그러한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고는 거의 믿지 못할 일이다..."
그동안 미국은 1, 2차 마산 항쟁에 유감의 뜻을 표했을 뿐이었지만 4월 19일의 사태에 대해서는 월터 패트릭 매카나기(Walter Patrick McConaughy) 주한미국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해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요청했으며 대사관으로 돌아오는 즉시 학생들의 행동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어 미 국무부장관이 주미 한국대사에게 항의각서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다음은 미국 국무부 기자회견 내용 중 일부이다. 세세한 토씨의 경우 다소 다를 수 있다.
"국무부는 금일 오후에 한국에서 확산되고 있는 국민의 불안과 폭력행위에 대해 우려하고 있으며... (중략) ...미국 정부는 한국의 시위가 근래의 선거와 비민주적이고 강압적인 방법에 대해 품고 있는 국민들의 불안을 반영하는 사건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양유찬 대한민국 대사에게 통고하였습니다..."
이렇게 미국이 등을 돌린지 얼마 안 되어 4월 21일에는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냈고 23일에는 장면이 부총리 사임서를 냈으며 그 날 이기붕은 부총리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다음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한 번 끓어오른 사회의 분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4월 25일 다시 불붙은 시위
교수들의 시위
學生(학생)의 피에 報答(보답)하라!
시간이 지날수록 소강되어가던 시위를 되살린 것은 4월 25일 서울대 대학교수단의 시위였다. 이번에는 학생이 아닌 대학 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오후 5시 50분경에는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 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를 하기에 이른다. 이에 시민들이 호응하여 시위 군중은 삽시간에 1만 명까지 불어났다.
이들은 19일에 있었던 참혹한 사태에 대해 지식인으로서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생때같은 자신의 제자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두려움 없이 나섰고 자신들을 겨누고 있는 총 앞에서 의연히 행진했고 결국 피를 흘려야만 했던 것에 대해 자신들 역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굳이 25일이냐 하면 먼저 매달 25일은 교수들의 봉급날로서 이 때 정기적으로 많은 교수들이 한데 모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봉급을 핑계로 당국의 의혹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명분이 생기는 셈이었다. 처음에 교수들은 많아봐야 50~60명 정도만이 모이리라 여겼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모인 교수들은 무려 258명에 이르렀다. 자기들도 이렇게 많이 모일 줄 몰라 놀랐다는 후일담이 있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는 대학가 사이에서 "교수가 시위에 참여하는 것은 벼룩을 일렬로 세우는 것보다 어렵다."라는 말이 있었다. 당시에는 유교적 문화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던 시절이라 식자층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 자체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던 때였다. 그만큼 교수들 사이에서 정치 문제에 간섭하는 것을 꺼렸다는 이야기이며, 교수들이 직접 시위에 참여한다는 것은 4.19혁명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교수들이 대단히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인식했다는 방증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열화와 같은 기립박수 속에 일사천리로 반정부 시위 및 행진을 결의하고 시국선언문을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시국선언문에는 참석자 258명 전원이 서명하였다. 그 중에 몇 명만 언급하자면 다음과 같다.
- 이종우(고려대), 이희승(서울대), 정석해(연세대), 조윤제(성균관대) 외 시국선언문 서명자 258명
이번 4.19의거는 이 나라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대한 계기다. 이에 대한 철저한 규정 없이는 이 민족의 불행한 운명을 도저히 만회할 길이 없다. 이 비상 시국에 대처하여 우리는 이제 전국 대학 교수들의 양심에 호소하여 아래와 같이 우리의 소신을 선언한다.
1) 마산, 서울 기타 각지의 학생 데모는 주권을 빼앗긴 국민의 울분을 대신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순진한 정의감의 발로이며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는 민족 정기의 표현이다.
2) 이 데모를 공산당의 조종이나 야당의 사주로 보는 것은 고의의 곡해이며 학생들의 정의감의 모독이다.
3) 평화적이요 합법인 학생 데모에 총탄과 폭력을 기탄 없이 남용하여 대량의 유혈, 참극을 빚어낸 경찰은 '민주와 자유'를 기본으로 한 국립 경찰이 아니라 불법과 폭력으로 정권을 유지하려는 일부 정치 집단의 사병이었다.
4) 누적된 부패와 부정과 횡포로서의 민족적 대참극, 대치욕을 초래케 한 총리를 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나지 않으면 국민과 학생의 분노는 가라앉기 힘들 것이다.
5) 3.15선거는 불법 선거이다. 공명 선거에 의하여 정, 부총리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6) 3.15 부정 선거를 조작한 주모자들은 중형에 처해야 한다.
7) 학생 살상의 만행을 위에서 명령한 자 및 직접 하수자는 즉시 체포 처형하라.
8) 모든 구속 학생은 무조건 석방하라. 그들 중에 파괴 또는 폭행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동료 피살에 흥분된 비정상 상태하의 행동이요, 폭행 또는 파괴가 그 본의가 아닌 까닭이다.
9) 정치적 지위를 이용 또는 권력과 결탁하여 부정 축재한 자는 관, 군, 민을 막론하고 가차없이 적발, 처단하여 국가 기강을 세우라.
10) 경찰은 학원의 자유를 보장하라.
11) 학원의 정치 도구화를 배격한다.
12) 곡학아세하는 사이비 학자와 정치 도구화하는 소위 문인, 예술인을 배격한다.
13) 학생 제군은 38선 넘어 호시탐탐하는 공산 괴뢰들이 군들의 의거를 선전에 이용하고 있음을 경계하라. 그리고 이남에서도 반공의 이름을 도용하던 방식으로 군들의 피의 효과를 정치적으로 악이용하려는 불순 분자를 조심하라.
14) 시국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국가의 장래를 염려하여 학생들은 흥분을 진정하고 이성을 지켜 속히 학업의 본분으로 돌아오라.
- 단기 4293년 4월 25일, 대학교수단
이는 이전의 시위와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인 것이었다. 위에 인용된 각 학교별 선언문에서 보듯 이전에는 '선거를 다시 실시하라' 는 것이 주요 요구였고 이승만 하야는 주요사항이 아니었으나 교수들은 이승만 하야를 직접적으로 요구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교수들이 서울 시내를 질서정연하게 행진하고 그 뒤를 시민들과 학생들이 따르고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삼창을 하고 애국가까지 제창했는데도 단 한 명의 경찰도 얼씬하지 않았다. 사전에 당국에 알리지도 않은 강행 시위였는데도. 당대의 교수라는 직분이 가지는 사회적 권위와 책임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잘 보여주는 예.
교수단 데모가 끝난 뒤에도 시민, 학생들이 통금 사이렌을 무시하고 시위를 계속했으며 일부는 철야농성까지 벌였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5시, 통금이 해제되자마자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오전 7시에는 3만여 명이 모여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였고 1만여 군중은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윽고 9시경에는 서대문에 있던 이기붕의 집이 파괴되는가 하면 같은 시각 45분경에 파고다 공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이 군중들에 의해 철거되었다.# 또한 정치깡패 보스들의 집을 공격해 부수었다. 이제 점점 상황은 이승만과 자유당을 옭아매고 있었다.
어린이들까지 나선 시위
10시경 시위 군중은 10만명으로 불어났으며 국민학생들도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 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하였다. 지난 19일, 피의 화요일 때 수송국민학교 6학년 학생이었던 전한승(13세)군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던 것이다.
수송국민학교 학생들이 데모하는 모습.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라는 플래카드가 보인다. |
아래는 당시 수송국민학교 학생 강명희가 남긴 글 《나는 알아요》.
아! 슬퍼요
아침하늘이 밝아 오면은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하늘과 저녁 놀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시위대와 계엄군이 하나가 되다
교수들의 시위가 끝난 후 계엄군이 출동하긴 했지만 탱크를 앞세운 데다 착검까지 하고 방독면을 쓰고서도 이미 군인들은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시위대 속 한 10대 소년이 탱크 위로 뛰어올라가서 외쳤다. "대한민국 국군 만세!" 민주화 관련 사료들 중에는 이때 눈물을 흘리는 군인들도 있었다는 서술이 있다.
이후로 계엄군은 시위대 건으로 현장에 출동할 때마다 시위대의 따뜻한 환영과 환호,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이미 계엄군은 이승만 정부를 지킬 마음이 사라져버린 상태였으며, 계엄군은 이승만과 자유당 정권의 '사병'이 아닌 국민을 지키는 '군대'가 되어있었다. 이후 시위대가 시위를 벌이는 곳에는 항상 탱크가 상징처럼 따라다녔다. 시위대는 탱크 위에 올라가서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이승만의 하야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
"미국으로 망명하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것만이 오직 유일한 길입니다."
ㅡ 이승만 대통령과 시민 대표 5명과의 면담 中
상황은 이승만에게 명백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26일 아침 김정렬 국방장관이 강경이 이 풍백에게 하야를 진언했고, 부인 프란체스카도 귀에 대고 결심을 재촉했으며, 4월 25일 수석국무위원으로 입각한 허정도 하야를 권유했다. 김정렬 회고록에 따르면 이때 이승만은 "내가 그만두면 더 이상 다치는 사람이 없단 말이지?"하고 결국 하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 이승만은 박찬일 비서관을 불러 성명서를 쓸 것을 지시했다. 초안에는 풍백대신 하야, 내각책임제, 재선거 등이 적혀있었지만 이승만은 그렇게 쓰면 안된다고 새로 쓰게 했다. 송요찬의 건의로 이기붕의 공직 사퇴 내용도 첨가되었다. 두번째로 쓰인 성명서가 밑에 있는 성명서다.
그때 송요찬 계엄사령관이 시민, 학생대표 5명과 이승만 풍백대신의 면담을 주선했다. 고려대 정치학과 유일나 등이 경무대 후원에서 이승만과 면담했다. 유일나가 "각하께서 하야하시는 길만이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라고 직언했고 이승만이 "뭘 하라고?"라고 알아듣지 못하자 옆에서 곽영주가 "step down"이라고 속삭였다. 이승만은 "날더러 저 하와이나 외국에 가서 살란 말인가?"라고 물었고 유일나는 "국민이 원합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때 미국 대사 맥카나기가 도착했다. 이승만은 대사를 기다리게 한 다음에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다. 유일나는 이집트 나세르의 예를 들며 북한과 대치 중이니만큼 2년간 군정을 한 다음에 민정으로 이양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했다. 허정이 옆에서 반대의 뜻을 밝혔고 이승만은 그게 송요찬의 지시로 한 말인 줄 알고 한국과 이집트는 상황이 다르다고 반대했다. 결국 이승만은 시민 대표와의 면담을 받아들였다.
10시 20분경 드디어 이승만이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했다. 비슷한 시간인 9시 45분경 파고다공원에 몰려든 데모 군중이 이승만 동상의 목에 철사줄을 걸어 쓰러뜨렸다. 현재는 그 자리에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세워져있다. 10시 40분에 이승만은 맥카나기 대사와 면담했는데 미국의 사퇴 압박을 전하려던 대사는 사퇴 성명서를 듣고 성명 지지 의사를 전달했다.
"나는 해방 후 본국에 돌아와서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보고를 들으면 우리 사랑하는 청소년 학도들을 위시해서 우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이 내게 몇가지 결심을 요구했다하니 내가 아래서 말하는 바대로 할 것이며 내가 한가지 부탁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동포들이 지금도 삼팔 이북에서 우리를 침입코사 공산군이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그들에게 기회를 주지 않도록 힘써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풍백대신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풍백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4) 내가 이미 합의를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 책임제 개헌을 하겠다."
짐작하겠지만 저기 "국민이 원한다면" 이라는 표현이 논란의 여지가 있었는데 이에 외무부장관은 기자들에게 이는 단지 문구상 표현에 불구하고 사실상 하야한 것이라고 확인해주었다.
시민들은 방송을 듣고 경무대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승리를 환호하였다. 시민들은 새로이 "질서를 지킵시다" 플래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며 길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이 풍백의 최후의 몸부림
4월 27일 이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미 방송으로 다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비서들의 잇따른 사임서 사인 요구에 버텼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늙은 독재자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허정도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김정열이 나서서 또 촉구했지만, 이승만의 대답은 역시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허정이 질서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하자 그때서야 어쩔 수 없었던지 사임서에 사인을 해 국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