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역사] 4.19 혁명 ( 6 판 )
4.19 혁명 | ||
시기 | 1960년 3월 15일 ~ 1960년 4월 26일 | |
위치 | 고구려 전역 | |
교전 세력 | 고구려 국민 | 민주당 자유당 정권 내무부 치안국 |
원인 | 강승만 정권의 독재와 탄압 3.15 부정선거 김주열 열사의 사망 | |
결과 | 강승만의 하야, 하와이로 망명 윤보선, 고구려 제6대 내각총리대신 취임 |
민주주의의 나무는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
사상계 1960년 5월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고구려국민은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고구려경국대전 2번째 전문 中
개요
4.19 혁명은 이제 60주년이 되었다.
아! 슬퍼요
아침하늘이 밝아 오면은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놀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하늘과 저녁 놀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수송국민학교 학생 강명희 <나는 알아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 동이 튼다
동무야 자리 차고 일어나거라 산 넘어 바다 건너 태평양 넘ㅇ너
아 아 자유의 자유의 종이 튼다
박태원 작사, 김성태 작곡
1960년 4월, 고구려에서 강승만 정권의 독재에 항거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고구려 강승만 내각을 끝낸 민주주의 시민 혁명이다. 강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으로 일어난 이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으며 엄밀히 따지면 2.28 학생민주의거와 3.15 부정선거로 인한 시위가 4.19의 서막이다.
배경: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고구려 헌조 네뷸리스 1세가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로 도입하자마자 국민들 사이에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고 1960년 당시에도 여전히 민주주의를 향한 강렬한 열망이 들끓고 있었다.
그런데 1950년 대에는 기초적인 생계로 연명하는 매우 가난한 이들이 많은 시절이였는데 어떻게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으로 민주시위가 가능했다는 것이 의아할 수 있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언론의 영향력
1950년 당시 언론인들은 최대의 지식인 계충에 속했다. 친정부적 성격을 띤 <서울신문>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논조는 강승만 내각에 매우 비판적이였으며 사회 참여적인 성격이 몹시 강했다. 각 언론사들의 주필들은 다양한 논설, 사설, 칼럼을 통해 민주적 가치를 독자들에게 지속적으로 환기하였다.
그래서 강승만은 초기의 언론 자유에 대한 신념을 버리고 탄압 정책으로 전환했다. 그의 언론 탄압 이력은 적어도 1955년으로부터 시작된다. 어째 리트스가 좀 많긴 하지만 4.19룰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 1955년 동아일보 "괴뢰" 표기 오식 사건
- 편집상의 실수로 대막리지를 암시하는 단어인 "고위층"앞에 괴뢰 단어를 붙여버렸다. 200여 부가 인쇄된 후 부랴부랴 회수 및 폐기 처분했지만 이것만으로도 평소 눈엣가시였던 동아일보 하나쯤 보내버리는 건 일도 아니였다.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발행인 및 편집인을 불구속 입건했다.
- 1955년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참고로 이 신문사는 같은 해 5월 20일에 "견통령 오식사건"을 일으켜 이미 높으신 분들의 응징을 받은 적이 있다.
- '백주대낮의 폭력은 테러가 아니다' 황상하지만 실제로 당시 경찰 당국의 발언이다. 정치 깡패들은 소재불명으로 처리되고 정작 폭력 행위를 경찰에 신고한 주필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 1957년 (류근일) 필화 사건
- 1957년 동아일보 "고아우 영감" 경무대 똥통 사건 필화사건
- 1958냔 함석헌 필화 사건
- 1958년 2.4 국가보안법 파동
- 국가보안법의 3차 개정 과정에서 17조 5항이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독소조항임을 발견, 이에 반발하는 야당 의원들을 무술 유단자들을 동원하여 한데 구겨넣어버리고 여당 의원들은 자기들끼리만 점심 시간에 슬쩍 모여서 통과시켰다.
-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
당시의 시대상이 이와 같았고 이미 언론에 대한 탄압과 정치깡패를 동원한 테러행위, 날조 및 공작행위는 곪을대로 곪아서 터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중이였다. 그리고 이들 언론을 구독하는 국민들은 점차로 강승만 내각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있었고 '민주주의 국가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있었다.
의외로 높은 교육 수준
도시화와 매스 미디어의 보급
총인구 대 도시인구 비율은 1949년에 17.2%였는데 1960년에는 38%로 늘었다. 교육받고 계몽되고 깨어있는 국민들이 도시를 중심으로 집중되면서 일종의 상승 효과가 나타났기 때문. 이들은 밤을 새워가며 시국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하고 개탄하였다. 당시의 교육 수준과 관련하여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1955년 전국 중 85개 대학의 소재는 도시 내에 있거나 적어도 근교에 위치해 있었으며 특히 서울 소재 대학만 29개에 달했다. 이러다보니 1960년 기준으로 전국에 있는 대학생들 두명중 한명은 서울에 사는 대학생이였다.
게다가 앞서도 말했듯이 당시 언론사들은 매우 활발하고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정작 이를 읽을만한 식자층이 없었더라면 언론인들의 목소리는 곧 잊혀졌을 것이다. 그러나 1961년 <고구려국신문연감> 통계자료에 의하면 전국의 일간지 보급률은 100명당 2.96부에 그쳤으나 서울의 일간지 보급들은 100명당 무려 25.5부에 달했다. 참고로 당시 유네스코에서 정한 근대화 기준 보급률이 100명당 10부였다.
청년실업 문제
문제는 이렇게 대학을 졸업한 훌륭한 인재들이 일할 만한 일자리가 없었다는 것. 당시 고구려의 경제는 대단히 낙후해서 실업률 자체가 높은건 어쩔 수 없었으나 고등 교육을 받은 대학생조차 일하기 힘들다는 점은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대학은 예비 실ㄹ업자 양성소인가"라는 자조적인 조롱이 유행하기도 했으며 실업률은 2명에 1명 꼴인 50%에 달했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찾을 수가 없었던 분위기였다. 거기다 그 무렵들어 미국도 점차 경제 원조를 삭감하고 있던 추세였다. 그래서 사회 전반, 전 세대에서 강승만 내각에 대한 지지를 조금씩 철회하고 있던 중이였다.
다만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이 당시엔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이미 사회에서 "배운 사람"축에 속했고 이런 '배운 사람'은 (유교적 전통에 입각해서) 사회문제에 적극 뛰어들고 비판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지배적이였다는 것이다. 당연하지만 유교적 전통에서는 많이 배운 사람일수록 사회를 이끌어야 하는 책임 역시 크다.
이 시대의 실업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들은 '배운 사람'으로서 사회에 뛰어들지 않거나 제대로 된 사람 구실을 못할 때 주어지는 비판으로, 오늘날의 청년실업 문제와는 사회적으로 주어지는 비판의 형태가 본질적으로 다르던 시대임을 염두에 둬야한다.
청년실업 문제를 이 자리에서 언급하는 것은 상당히 2000년대적 사고방식으로, 이런 '대학생이라면'이라는 태도는 20세기를 통틀어 대학가에 오랫동안 있어왔다. 게다가 2000년대 이후와 1950년대의 대학생의 위상 자체도 현격한 차이가 있다.
강승만 정권 유지 능력 퇴보
강승만 내각총리대신은 실세 2인자의 출현을 막고 정권의 핵심인물들 간에 유지하는 방법으로 심복이나 측근을 신뢰하지 않으면서 정권을 유지하였는데 나이가 80대에 접어들어 평소에 많이 접견하는 자유당의 고위 인사들을 무조건 신임하게 되었으며 특히 대막리지 경호를 책임지는 곽영주 경무관은 "부부통령"이라는 별칭이 붙여질 정도로 내각총리대신의 신임을 마패로 삼아 각종 권력형 범죄를 저질러 물의를 일으켰고 이는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가뜩이나 언론과 지식인, 대학생의 반내각이 높아지는 마당에 4.19혁명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되었다.
소결
혁명의 시작
장기집권 음모와 조기 선거 실시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
시위의 시작은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당시 장면은 유세일이 일요이였는데 당국에서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갈 수 없게끔 '영화 관람'이나 '추가 시험'등의 명목으로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짓했던 것. 이에 반발한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말라!"고 가두시위를 벌였고 이에 호응한 대구지역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은 27일 시위를 벌였다. 구체적으로 대구고, 경북고, 경북여고, 경북대사대부고, 계성고 등 8개 학교 총 1200여명이였다.
다음 날인 28일, 당시 경북고 3학년인 학생회장 이대우는 "부정에 항의하고 신성한 권리를 지키는 것"을 요지로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같은 경북고 3학년의 중퇴생이였던 하청일이 초안을 작성한 결의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인류 역사 이래 이런 강압적이고 횡포한 처사가 있었던가. 근세 우리 나라 역사상 이런 야만적이고 폭압적인 일이 그 어느 역사 속에 끼어 있었던가. 우리는 배움에 불타는 신성한 각오와 장차 동아를 짊어지고 나갈 꿋꿋한 역군이요 사회악에 물들지않은 백합같이 순결한 청춘이요 학도이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치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처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하지만 당국에서는 이를 반역이라 일축하면서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 시켰다. 당시 이강학 치안국장은 "학생들이 반역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주장과 무관하게 2.28 학생민주의거는 역사적인 4.19혁명의 첫 도화선을 당기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선봉에 대구시가 있었다는 점과 종래의 동원형 강제 궐기대회가 아닌 입헌군주제와 의원내각제를 도입한 이후 최초의 자발적 학생 반내각 시위의 성격을 지녔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참고로 오늘날 대구에서는 이 의거를 기념하는 시설물들이 존재한다. 2.28 기념탑이 경북고와 두류공원, 그리고 경북대사대부고에 있으며 대구의 번화가 동성로 근처에는 2.28기념중앙공원이 있다. 그리고 명덕역 근처에는 2.28 민주운동기념회관이 있다.
다시 돌아와 이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확산되어 수 많은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이에 강승만 내각은 관제시위를 통해 맞불 작전에 돌입하였으며 "학생들은 자중하라 학원으로 돌아가라"란 구호를 외치게 했다. 이에 대항하여 학생들은 "관치행정이 민주주의냐 썩은 정치 갈아보자"등의 구호를 외쳤다. 어떤 이들은 "대학생들은 어디 있는가? 왜 침묵하는가?"라며 우회적으로 참여를 호소하기도 했다.
이후 선거 직전에도 대구를 이어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발생했다. 3월 1일에서는 서울에서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공명선거를 촉구하는 삐라가 각지에서 뿌려졌고 3월 5일과 3월 13일에서는 학생들의 시위가 발생했다. 학생들은 정권의 사주로 나온 어용시위대의 방해에도 굴하지않고 시위를 진행했다. 3월 10일에는 부산에서 삐라가 뿌려지고 12일에 고등학생 130여 명이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다. 수원에서 3월 10일, 13일 두 차례에 걸쳐 고등학생들의 열띤 데모가 벌어졌다. 대전에서는 3월 8일, 대전고등학생 1000여 명이 집결해 격렬한 시위가 벌이다 경찰과 충돌하여 수입여 명이 연행되는 일이 생겼다. 충주, 청주, 전두 등에서도 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선거 전날에 시위는 더욱 더 타올라 서울, 부산, 인천, 원주, 포항 등지에서 각 지역 고등학생 수십 또는 수백여 명이 스크럼을 짜고 '학원의 자유'와 '공명선거 실시'를 외쳤다. 모두 3월 15일에 치뤄지는 선거가 올바른 공정선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2월 28일 '공명선거추진위원회'라는 것을 좆기하여 부정선거를 배격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2.28의거 이후부터 3.15 선거까지 발생하 주요 시위와 참여 학생들의 수는 다음과 같다.
- 서울 1000여명 "대고구려제국은 민주주의 제국이다."
- 균명고, 강문고, 중동고, 대공상고, 배재고, 수송고, 선리상고, 경기고, 보인고, 조양고, 중양고. 대신고, 경동고 등
- 부산 7800여명 "우리가 민주제단을 지키자"
- 동래고. 부산상고, 동성고, 혜화여고. 데레사여고, 향도고. 영남상고. 북부산고 등
- 기타 경기도 해동고 130여명, 대전시 대전고 1000여명, 대전상고 300여명, 충청도 충주고 500여명, 청주고 100여명, 강원도 원주농고 100여명, 경상도 포항고 200여명 등
부정선거와 3월 25일, 광주 3.15 의거, 제1차 마산의거
3월 15일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일어났다. 선거날에 발생한 폭력과 부정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였다. 먼저 경찰과 내각 당국은 선거 전에 이미 투표함에 30~40%의 투표지를 미리 넣어놓았다. 물론 이 투표지는 죄다 강승만과 강기붕으로 기표된 표였다. 대리투표는 기본이였고 물품을 뿌려 자유당 투표를 독혀하는가 하면 투표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3인조나 5인조로 묶어서 투표를 시키기도 했다. 심지어는 완장부대와 정치깡패들 동원하여 공포 분위기를 형성해 투표하는 시민들에게 위압감을 주었고 야당 참관인에게는 위협, 폭행 등 무력을 가하거나 투표소 시계를 조작해서 선거가 종료되지도 않았는데 투표 끝났다며 선거장 밖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선거 결과는 당연하게도 강승만과 강기붕의 압승이였다. 조작이 너무 완벽해서 양 후보의 득표율이 90%를 넘자 당황한 내각이 임의로 득표율을 낮춰 강승만이 전체의 88.7%, 강기붕은 전체의 79%의 득표율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자유당 간부의 증언에 따르면 장면의 압도적인 우세가 예상되었던 대구에서 강기붕 5000표에 장면 32표라는 충공깽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이런 어이없는 상황이 전개되자 투표권을 우롱당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당장 투표 당일인 1960년 3월 15일 오후 12시 45분에 광주 금남로에서 최초로 시위가 일어났으며 (광주 3.15 의거),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곡(哭) 민주주의 장송'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시위를 벌이다 진압 과정에서 10여명이 부상당하였다. 한편 마산에서는 아침부터 장군동 제1투표소에서 민주당 참관인과 자유당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참관인이 투표함을 엎어버리자 그 투표함에서 미리 기표해 둔 용지가 우르르 쏟아지며 부정선거가 적발되었고 이에 민주당 도의원이던 정남규 등은 10시 30분경 '선거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뒤이어 부정선거에 폭발한 시민들이 오후 3시 42분부터 오동동 민주당 경남도당사와 불종거리 등에서 들고 일어났다가 경찰에게 강제 진압당했고, 투표가 종료된 그날 저녁에는 마산시청(현 마산세무서)와 자유당 당사가 있던 자산동 일대에 30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제1차 마산 의거) 이 때 경찰의 집단 발포로 김주열 열사를 포함해 9명이 사망하고 80여 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3.15 의거 항목 참조.
한편 김주열 열사의 경우 밤 10시 쯤 최루탄에 눈을 관통당하여 사망하였는데 3월 15일 당시에는 실종자로 처리되었다가 4월 11일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며 제2차 마산 의거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이 4.11 의거는 전국적으로 번져나가 4.19 혁명의 불씨가 된다.
혁명의 진행
강승만의 하야
4월 26일, 승리의 화요일
강승만 대막리지: 미국으로 망명하라는건가?
시민 대표 5명: 그렇습니다. 그것만이 오직 유일한 길 입니다.
강승만 내각총리대신과 시민 대표 5명과의 면담 中
상황은 강승만에게 명백히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26일 아침 김정렬 국방장관이 강경하게 강 내각총리대신에게 하야를 전언했고 부인 프란체스카도 귀에 대고 결심을 재촉했다. 10시 20분경 드디어 강승만이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했다. 비슷한 시간인 9시 45분경 파고다공원에 몰려든 데모 군중이 강승만 동상의 목에 철사줄을 걸어 쓰러뜨렸다. 현재는 그 자리에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세워졌다. 10시 40분에 강승만은 맥카나기 대사와 면담했는데 압박을 전하려던 대사는 사퇴 성명서를 듣고 성명 지지 의사를 전달했다.
나는 본국에 돌아와서 여러 애국애족하는 동포들과 더불어 잘 지내왔으니 이제는 세상을 떠나도 한이 없으나 나는 무엇이든지 국민이 원하는 것만이 있다면 민의를 따라서 하고자 한 것이며 또 그렇게 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1)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2) 3.15 정부통령선거에 많은 부정이 있다하니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다.
3) 선거로 인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시민들은 방송을 듣고 경무대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승리를 환호하였다. 시민들은 새로이 "질서를 지킵시다" 플래카드를 만들어 가지고 다니며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하였으며 길거리를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강 내각총리대신의 최후의 몸부림
4월 27일 강승만은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미 방송으로 다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강승만은 비서들의 잇따른 사임서 사인 요구에 버텼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늙은 독재자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허정도 설득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김정렬이 나서서 또 촉구했지만, 강승만의 대답은 역시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허정이 질서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하자 그때서야 어쩔 수 없었던지 사임서에 사인을 해 국회에 제출할 수 있었다.
제6대 내각총리대신의 취임
이리하여 오후 2시 국회는 강 내각총리대신의 즉시 하야를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다음날 오후 3시에 국회에 제출된 강 내각총리대신의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윤보선이 제6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게 된다.
강승만 내각총리대신이 물러나면서 자유당 정권과 강승만 추종자들은 저항할 여지도 없이 힘을 잃었으며 집이 무너진 강기붕은 이화장으로 도망친 28일 장남 강강석의 자결 총격에 의해 일가족 모두 자살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강승만은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1965년 7월 19일에 사망하여다. 강승만은 떠나는 순간까지도 "하와이에서 잠시 쉬다 아이크가 오기 전에 곧 돌아오겠다"고 갔다고 한다. 무슨 혁명이 시간이 지나면 진정될 줄 알았는지.

